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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Sep 10. 2017

We(피해자,가해자 그리고 수혜자) Must Speak

아이 캔 스피크 [브런치 무비패스]


대신 위로해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현실에서 못 이룬 소명을 이뤄주는 희망고문 같은 영화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기승전'감성팔이'인 한국 영화의 재등장인가라는 선입견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영화의 중후반부 'HR121(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이라는 실제 용어가 등장하고 역사적 현장의 사진이 인서트 되면서 픽션이 아닌 가까운 과거를 재현한 영화임을 깨달았다. 부끄럽게도 필자는 '위안부'라는 대한민국의 비통의 역사에 대해 그리고 그 피해자들에 대해 그 정도로 무감했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예견된 오류였다. 뉴스와 각종 SNS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대응 혹은 과거 만행을 접하게 되었을 때, 국민으로서 공분은 했지만 항상 거기까지였다. '나 아닌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하고 있겠지'라는 막연한 자기 위안을 하며 쉽게 세상의 다른 것들에 빠져들었다. 흡사 소리 없는 아우성.


실천을 못할지언정 사태는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육하원칙의 관점에서 굵직굵직한 흐름을 놓치고 있어서는 안됐다. 어떤 잔인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인생과 '일단은' 무관한 일이기에 '잠시' 잊은 것이 용서될 것이라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Encyclopedia, Ecology, Latitude, Longitude. 우리는 이 단어들의 의미를 몰라도 사는 데에는 지장이 없다. 딱 그 정도의 인생을 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말리지 않겠다. 코앞의 일에만 몰두하는 삶. 이 단어들은 박민재(이제훈)가 나옥분(나문희)에게 암기하라고 지시했던 단어들이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위의 단어들이 우리의 삶과 무관한 단어들일까? 백과사전, 생태학, 위도, 경도 이 단어들을 알아야 하는 당위는 우리가 위안부 역사를 알아야 하는 당위로 도치된다.


<아이 캔 스피크>에는 크게 두 가지 이슈가 존재한다. 재개발로 인해 전통시장의 상인들이 쫓겨날 위기에 처한 전반부 이야기. HR121 현장을 재현하며 위안부 역사를 우회적으로 제시하는 후반부 이야기. 전혀 교집합 없어 보이는 두 개의 사건. 물론 사라져가는 전통 시장이라는 존재를 점점 잊혀가는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메타포로 읽어내려 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는 공통점보단 두 가지 이슈의 차이점으로부터 이 영화를 파악하고자 한다.


'아이 캔 스피크(I Can Speak, 2017년 作)'



두 사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어떤 관계끼리의 문제냐'에 있겠다. 우선 '재개발 문제'는 대한민국 국민 내의 문제이며, 각자의 이익집단의 문제이다. 나옥분, 족발집 주인 혜정(이상희)을 포함한 전통시장의 상인들과 명진 구청 혹은 재개발 주체 측의 문제. 그러니까 민관이 얽혀있는 문제. 이들의 문제는 법적, 정치적, 도덕적 문제가 얽혀있어 동족들 사이에서 옳고 그름에 대한 온도 차가 발생한다. 반면에 '위안부 이슈'는 필자가 그러했던 것처럼 국민 모두를 동시에 뜨겁게 한다. 공무원의 미덕은 면피라고 말하던 양팀장(박철민), 옥분과 대립각을 세우던 혜정, 심지어 영화 속 상대적 악인 용팔이라 불리던 빡빡이(김일웅)에 이르기까지 모두를 하나의 운명 공동체로 묶는다. 즉, '위안부 역사'는 온 국민에게 평등한 깊이와 넓이로 다가오는 범국민적인 비감적 이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옥분이 짊어지고 있던 각종 대소사들은 '파쇄'한다. 그 찰나의 허무주의적 순간이 지나면 그녀에게 그리고 우리에게는 오롯이 한 가지 이슈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게 될 것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자는 듯, 시시콜콜한 이해관계에 얽매이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듯. 그래서 필자는 <아이 캔 스피크>에는 분명 김현석 감독의 제언적인 의지가 담겨있다는 입장이고, 그런 연유로 처음부터 두 이슈의 차이점에 더 흥미를 보인 것이다.


감독의 계몽 의식을 조금 더 밀고 나가는 소지의 발언 혹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방법론에 대한 발언을 첨언한다. '영어'는 어찌 되었던 국제적 이해관계를 윤활시키는 공통어라 할 수 있다. 같은 '국어'를 하는 이들끼리도 이렇게 소통이 되지 않는데 - 영화 속에는 진주댁(염혜란)과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 등의 유머 코드의 불일치, 아영(정연주)과 박민재의 대화 불일치, 구청 계단의 화살표 방향의 오류 등 수많은 소통의 부재가 등장한다 - 한 세기가 다 되어가는 할머니에게 영어로 자신의 의사를 피력하라는 것은 마치 드니 빌뇌브 감독의 <컨택트> 속 루이스(에이미 애덤스)가 외계인과 소통하는 것만큼 힘든 일일 것이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방법론적 측면에서 옥분이 연설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의 영화 속 과정을 비유적으로 명료화하면, 우선 화자가 영어로 연설할 수 있을 정도까지의 수준이 되어야 하며(필사의 학습), 정부가 적극적 개입을 해야 하고(공무원 박민재의 도움), 전 국민적 도움이 필요하다(옥분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전달된 시장 사람들의 정성). 이것이 역사의 수혜자들인 우리의 의무이리라. 그래서 이 영화는 계몽적이며 무리하게 표현하면 정치적으로까지 보인다.



영화의 시작으로 돌아간다. 명진 구청으로 전근 온 박민재의 첫 출근. 이문세의 <가로수 그날 아래 서면>의 도입부와 함께 시작되는 부감. 이후 영화에서는 부감이 3~4번은 더 등장한다. 등장 순서를 시대순으로 재조합하게 된다면 가장 첫 번째 부감은 일제강점기 시절 위안소에서 자살이 실패한 옥분과 그녀를 구해낸 정심(손숙)의 소녀 시절을 보여주는 장면이고 가장 마지막 부감은 미국 국회에서 연설하는 옥분의 모습이다. 이 부감 숏의 주체가 초현실적인 존재이든, 영화이든 혹은 무엇이든 어쨌든 진실을 지켜보고 있었던 그 '무엇'은 2007년 연설장까지는 건재하고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이제 HR121로부터 또다시 10년이 지났다. 'I Can Speak'라는 문장의 주체가 누구에게나 적용되어야 할 시점이다. 피해자들, 가해자들 그리고 수혜자들에게. 필자는 이제 무엇을 해 볼 수 있을지 생각과 실천을 병행해볼 생각이다.


마지막 첨언. 재레드 다이아몬드 박사의 <총, 균, 쇠>의 추가 논문 '일본은 어디에서 왔는가'의 내용 인용. 이 논문의 논조는 역사의 어느 시점에 대규모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이주를 했고 현대 일본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었다(물론 이것은 아직까지는 학설이다). 즉, 우리는 같은 피를 나누었고,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형제와도 같다는 이야기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형제는 아무리 절연했다 한들 완전한 절연은 불가능하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마음속 한구석에 형제애의 회귀를 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제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동아시아 관계를 형성해 나가야 한다. 즉, 서로 협력하고 위무해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악전고투보다는 진심 어린 사과의 제스처를 보이면 형제간의 불화는 눈 녹듯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 (별 3개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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