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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Sep 17. 2017

아프리카의 '피'눈물

콘스탄트 가드너


서울대 대출 도서 1위라는 어마 무시한 홍보 아래 한동안 독서광들의 명서였던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그 책의 프롤로그에는 꽤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어쩌면 인류의 시조, 조상이라고 제기되고 있는 아프리카인들(명확한 근거가 도출되어있는지, 심증의 수준인 것인지는 필자는 정확히 알고 있지 않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가장 오래 되었으니 유전학적으로 최대의 진보를 했어야 할 그들인데, 왜 부, 힘 그리고 삶의 수준 등에 있어서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훨씬 뒤처져 있는 상태인가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지점이다. 물론 이 책은 13,000년 역사 속에서 끊이지 않는 이런 불평등을 다각적으로 접근하고 분석하여 '환경지리적 조건의 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이야기이다. 필자가 <콘스탄트 가드너>를 보며 <총, 균, 쇠>를 떠올린 것은 이러한 맥락 때문이 아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연구처럼 불평등은 지역적 특성으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일 수도 있고, 어느 학자들의 의견처럼 생물학적인 차이에서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궁금한 점은 왜 역사 속에서 상위의 포식자는 하위의 포식자를 '침략'하고 '착취'했느냐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자행되고 있느냐이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은 전작 <시티 오브 갓>을 통해  세상을 놀라게 하며 아프리카의 현재를 목도하게 만들었다. 다음은 아프리카다. <콘스탄트 가드너> 또한 분명히 가려진 실체를 드러내려는 그러니까 전작과 같은 카테고리의 영화인 것은 명확하다. 아프리카 케냐의 로케이션으로 촬영을 해 미장센을 삶의 실상으로 채워놓았다. 에이즈에 병들어가고, 병원 치료를 위해 40km를 걸어야 하는 그럼에도 그 와중에 착취를 당하고 있는 그러니까 언제나 죽음과 맞닿아 있는 그들의 삶.


이런 흐름이면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콘스탄트 가드너>는 사회 고발성이 짙다. 우방국 제약회사들의 값싼 임상실험, 세금 감면을 득(得) 하기 위한 아프리카 정부와의 결탁, 모든 상황을 관조하며 태연자약한 태도로 일관하는 기득권 세력들. 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얼마 전 대한민국을 분노케 했던 '가습기 살균제 사건'이 떠오르기도 한다. 이 영화가 고발한지 12년이 지나도 현상 유지 중인 것들 말이다. 그런데 이 이해관계에는 단순히 제약회사의 금전적 이익만이 엮여있는 것이 아니다. 제약회사의 주가 상승으로 경제적 이득을 보는 집단이 존재하고 이 메커니즘 속에 더욱 깊숙이 들어가면 군수업체까지 긴밀하게 엮여있기에 이른다. 점입가경(漸入佳境).


무시무시한 점은 가해자에 속하는 이들의 사상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차피 하루에도 여러 다른 문제들로 아프리카인들은 수없이 죽어나간다. 자신들의 개발 약 실험을 조건으로 무료 진료와 약 처방을 제공하니 오히려 그들을 돕는 것이다.'라는 논리. 얼핏 들으면 그럴듯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계급주의와 인종차별주의가 고스란히 녹아있는 것이다. 문제는 가해자 쪽에 위치한 영화 속 누군가(어쩌면 현실의 누군가)의 마음에는 차별이 당연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필자는 이 영화 한편을 통해서 그들을 박멸할 수 없음을 잔인하게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아프리카의 눈물 아니 아프리카의 '피'눈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콘스탄트 가드너(The Constant Gardener, 2005년 作)'



'Constant Gardener'를 그대로 직역하면 '지속적으로 정원을 관리하는 사람' 정도가 될 것이다. 우선 이 제목은 주인공 저스틴 퀘인(랄프 파인즈)의 캐릭터의 속성과  일치한다. 정원관리를 좋아하는 온화한 성품의 인물.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 이 단어에는 생각보다 불편한 뉘앙스가 녹아있다. 무심, 무책임 그리고 무력. 끊임없이 정원을 관리한다는 뜻은 다르게 말하면 정원 밖 세상으로 나오지 않고 자신의 공간 정도만 관리한다는 뜻이 된다. 온실 속 화초. 더 비약을 하면 세상일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안위 정도만 생각한다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 왜 세상을 직면하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본다면, 자신과 관련 없어 보이는 세상의 문제들에 대한 '무심함'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문제를 알고는 있지만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무력감은 어쩌면 노력해보지 않고 지레 포기하는 데에서 오는 '무책임'이 원인일 수도 있겠다.


저스틴은 결국 원하지 않게(거의 끌려 나오다시피) 정원 밖으로 나와 세상과 직면하게 된다. 이 직면의 과정은 한 인간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거대한 세상의 폐해와 마주하는 과정이고 이 과정에 대한 정서적, 상황적 변화의 흐름은 다시 무심, 무책임, 무력의 단어들로 설명 가능하다. 즉, 무심/무책임 -> 관심 -> 무력으로의 흐름.


이 흐름을 찾기 위해 영화 속에서 주객을 전도 시키는 두 개의 시퀀스를 말해야 한다. 처음 저스틴이 '객'이었던 순간. 병원을 가기 위해 40km를 걷는다는 아프리카인들을 차에 태우자는 테사(레이첼 와이즈). 하지만 저스틴에게는 현재의 테사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 타인보다는 어쨌든 자신의 가족의 안위가 우선이기에 저스틴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소수의 사람을 돕는다고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런 일은 기관에게 맡겨야 한다는 저스틴의 말은 사실 무심함과 무책임함에 대한 자가 증명이다.


다음 저스틴이 '주'가 되는 순간. 침략자들에게서 브란트의 조수 아프리카 소년 아부를 지켜내려고 고군분투하는 순간. 그 순간 저스틴은 테사가 되어있다. 세상의 질서보다 하나의 생명을 중히 하는 그 말이다. 하지만 저스틴도 테사도 주체였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들은 어떤 희망의 불씨도 일으키지 못한다. 여기서 흐름은 무력으로 귀결된다. 그렇다. 개인은 거대 시스템을 상대하기에는 너무 비루하다.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니 영화는 개인들을 모두 세상이 아닌 곳으로 떠나보내지 않았던가. 말하자면 <콘스탄트 가드너>는 개인에게 문제의 화살을 돌리고 있지는 않다. 화살이 향한 곳은 전체의 시스템이다(이것은 명백하다).


필자는 이 영화가 대단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의 스토리라인의 미약함을 지적해가며 난도질을 하고 싶지는 않다. 의도, 용기, 진정성만큼은 결코 평가절하할 수 없기에.


필자는 <콘스탄트 가드너>는 개인에게 모든 문제의 원인을 촉구하는 영화는 아니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니 없을지도 모르지만 영화를 대신하여 탈무드의 한 문장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 (별 3개)

아프리카의 '피'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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