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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Sep 18. 2017

퍼펙트 해지기 위해 필요한 중도의 길

어 퍼펙트 데이 [브런치 무비패스]


우물에 빠진 시체를 견인하는 설정은 절묘한 측면이 있다. 카메라가 우물에 들어가게 되면 가장 자연스러운 쇼트는 수직 앙각의 쇼트일 것이고, 그러면 관객의 눈길은 반강제적으로 우두커니 자리를 지키는 하늘로 향하게 되기에. 영화 속에서 '하늘'은 다양한 역할을 한다. 때로는 삶의 불가지론적 측면을 제시하기도 하고(<밀러스 크로싱>), 때로는 인간의 무력감을 극대화하기도 하며(<미스트>), 때로는 본인이 직접 나서 정의사회를 구현하기도 한다(<레이디 킬러스>). - 필자가 내놓은 예시의 영화들은 당장 떠오르는 영화를 나열한 것뿐이다. (정성일 평론가적 표현으로) 혹여나 다른 자리 혹은 다른 글을 쓸 기회가 있다면 바뀔 공산이 크다 - 그런 측면에서 <어 퍼펙트 데이> 속 쾌청한 하늘을 몇 번이나 보여주고, 하늘의 시점 쇼트라 할 수 있는 부감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분명히 하늘의 역할이 존재하게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영화의 하늘은 '자애'의 하늘이다.


하늘에 의미를 부여한 것처럼, 영화에는 은유가 중요하다. 특히 '3'에 대한 고찰. 잠시 영화 속에 등장하는 숫자놀음을 (떠오르는 정도만) 언급하겠다. 우선 영화의 첫 장면, 하늘과 우물이 마주 보고 있는 수직선 (관객의 입장에서) 혹은 수평선(하늘과 우물의 입장에서) 사이에 얼굴을 불쑥 들이미는 맘브루(베네치오 델 토로). 두 개의 이미지 사이에 들어온 3번째 이미지. 두 번째 은유, B(팀 로빈스)의 첫 등장. 지뢰를 숨겨놓은 소(Cow)의 시체를 피해 가기 위한 좌측, 우측 양 갈래의 방법론 중 그가 선택하는 소를 밀고 지나가는 3번째 선택안(이 장면은 후반부 소 몰이를 하는 중년 여인의 뒤를 따라가는 방법으로 변주 된다). 세 번째 은유. 카티야(올가 쿠릴렌코)에 대한 한 동료의 평가. 손가락 세 개를 피며 3점 만점의 3점(그러니까 만점). 마지막으로 니콜라(엘다 로지도빅)의 집에 개 줄을 풀기 위한 방법론. 그들이 개에게 먹이는 마취제 가득한 소시지 3개. 지금 떠오르는 것만 네 가지다. 도대체 왜 감독은 프레임 속에 3이라는 숫자를 지속적으로 환기시키고 있는 것일까?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선행적으로 사유해보아야 할 것은 '전쟁'의 근본적인 발생 이유이다. 단순하게 말하면 전쟁은 이분법적 사고관 때문에 발생한다. 저변에 깔려있는 흑백논리.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행위. 이때 분노와 오래된 골로 청맹과니가 되어버린 흑, 백의 집단에게 필요한 것은 회색빛깔의 중재자의 역할이다. 그러니까 제삼자의 개입. 이 개념을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가 보자. <어 퍼펙트 데이>는 보스니아 내전 후 UN에 의해 표면적 평화협정을 맺은 직후의 발칸반도를 배경으로 한다. 보스니아인들 입장에서 이곳에 주둔하는 UN 군 혹은 맘브루를 필두로 한 NGO 구호단체 요원들은 제삼자가 된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그들의 역할론에 대한 이야기이다. 3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 그래서 영화는 3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조한다. 어쩌면 <라쇼몽>의 돌연변이적 아류 혹은 다른 판본.


'어 퍼펙트 데이(A PERFECT DAY, 2017년 作)'



조금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위해 제삼자들의 행보를 봐야겠다. 내전과 평화협정을 하나의 큰 판으로 보고 정치적, 원칙주의적, 국가적 관점의 잣대로 움직이는 UN. '국경 없는' 구호를 내걸고 전쟁 속에서 '사람'을 보는 인본주의적인 NGO 단체. 전쟁을 하나의 큰 시장으로 보고 그 안에서 경제적 이득을 취득하려는 사람들(우물에 빠진 시체로 인해 물을 마시지 못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물을 파는 이들의 에피소드를 떠올려보자). 3번째 예시는 당연히 비판적 어조로 봐야 할 것이니 차치하고 영화의 딜레마 제기는 앞의 두 가지 경우로 제한할 수 있겠다. 물론 이상주의자들 눈에는 맘브루 팀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겠지만, 원칙 없는 행동은 더 큰 문제를 양산할 공산이 크다. 무엇보다 그들은 UN의 보호가 없으면 한없이 나약해진다. 내가 보기에 <어 퍼펙트 데이>는 둘의 적절한 '합일'을 기대하는 영화이다. 더 지엽적으로 들어간다면 인본 쪽에 조금 더 점유율을 둔 합일(사람을 죽인 밧줄이 사람을 살리는 밧줄로 변모하는 순간 다시 그것을 죽임의 밧줄로 만들었던 것이 어떤 집단이었는지를 반추해 보는 것이 필자의 의견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이 지점에서 떠올려야 할 두 명의 여성. 카티야, 소피(멜라니 티에리). 소피를 일컬어 자신의 예전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카티야. 그러니까 이들은 한 인물의 과거와 미래를 분열시켜 놓았다고 할 수도 있고, 각각으로 본다면 보수와 진보, 혹은 원칙과 자유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있겠다.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원칙주의자적 발언을 지속하는 카티야는 어느덧 이 팀에 동화되어있고, 우물 안 시체조차 쳐다보지 못하고 UN 브리핑에서 열혈소녀의 면모를 보이던 타협 없던 소피는 어느덧 시체를 똑바로 쳐다보고 욕을 뱉는 전쟁을 제대로 파악한 인물이 되어있다. 전혀 교집합이라곤 없어 보이던 이들의 거리 좁히기. 화합 혹은 중도의 길. 영화가 원하는 융합적 제삼자의 모습. 다르게 이야기하면 그녀들의 성장 로드무비.


영화의 개입에 대한 추가 고찰. 일반적으로 제목에 확신적 어조의 수사가 붙을 경우에는 그것이 역설적 의미로 사용될 때가 많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그랬듯. <어 퍼펙트 데이>도 마찬가지. 마치 이것은 이들의 하루가 '퍼펙트'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언으로 들리지 않는가? 분명 그들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고, 의기투합하여 시체를 꺼내 올리기 직전에 모든 일이 어그러지는 허망감에 사로잡히기도 하였으니 그들에게 오늘은 'IMPERFECT DAY'임을 부인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피엔딩'이라는 결말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이것은 이 영화의 태도 때문이다. 화합의 중요성을 피력만 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개입하여 장대비를 흩뿌리며 미제 사건을 해결해 주는 태도. 그렇기에 인물들은 해결의 순간을 모르고 있음에도 황망함을 떨쳐버리고 희희낙락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속한 세상의 태도를 감지하고 있기에.

이것이 필자가 서두에 '자애'의 하늘이라는 언급한 근거이자, 우물 속 카메라가 오매불망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이유이다.

실제 '보스니아 내전'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가지고 가면서도 계몽을 하기 위한 강한 어조로 영화를 이끌고 나가는 진부함을 보이지도 않고, 전쟁의 실상을 보여주겠다는 미명 아래 관객몰이용 자극적 장면을 난삽하는 뻔뻔함을 찾을 수 없는 것도 필자가 언급한 이 영화의 태도와 그 맥을 같이하기 때문일 것이다. 유머와 풍자로 둘러싼 지적인 영화. 필자가 이 영화를 참 '괜찮은 영화'라고 보는 이유가 바로 이 지점이다.

★★★☆ (별 3개 반)

퍼펙트 해지기 위해 필요한 중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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