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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Sep 20. 2017

구세대와 신세대

덩케르크


스티븐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의 끝 무리 즈음 오스카 쉰들러(리암 니슨)는 더 많은 사람을 구하지 못한 자책감에 절규한다. 이때 인용된 탈무드의 한 문장은 다음과 같다.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죽음이 두렵고 묵직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우리 삶 속에서 빈번하게 마주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 세계 대전쯤 되는 특수한 경우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수많은 전사자들이 발생하고 죽음은 일상 속에서 당연한 것이 되어간다. 원래 사람은 익숙함의 동물이기에 죽음에 대한 집약적 경험이 기하급수적으로 쌓이면 어느덧 '죽음'의 무게가 혹은 '생명'의 무게가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지게 된다. 이것은 죽음 자체에 무감각 해진다는 뜻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생명의 숭고함을 망각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어차피 폭격 한 번에 수많은 생명이 소멸되는데 한 명 구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 아닌가?라는 무력감 같은 것.


<덩케르크>는 <쉰들러 리스트>에 인용된 탈무드 어구를 관통하는 영화로 보인다. 한 명, 한 명의 중요함. 어떤 한 명은 자신의 공군으로서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다른 한 명은 민간 어선으로서의 목표에 최선을 다한다. 또 다른 한 명은 자신의 지휘관으로서의 무게를 지키는 데에 최선을 다 한다. 이 한 명, 한 명의 노력이 모여 태산이 되고 그 태산은 결국 역사의 흐름을 만든다.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줄행랑은 비겁한 짓이지만, 덩케르크 구출 작전은 영국의 높은 국민성과 아직 소멸하지 않은 인간의 정의로움을 증명했다는 데에서 처칠 수상의 찬사를 받는다(영화 마지막 신문기사에 보이듯이). 그런데 필자는 이상하게도 가슴이 희망으로만 부풀어 오르지 않는다. 나와 다른 국가의 이야기여서? 나와 다른 세대의 이야기여서?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니다. 분명히 어선들이 덩케르크만에 다다랐을 때 그러니까 볼튼 사령관(케네스 브래너)이 '조국'이 보인 다고 했던 순간, 한스 짐머는 다분히 애국스러운 음악으로 화답함에도 그것에 압도되는 것은 잠시뿐이다.

왜일까? 필자의 마음을 채우지 못한 나머지 반은 무엇인가? 필자는 다시 '한 명'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덩케르크(Dunkirk, 2017년 作)'



확실히 <덩케르크>는 전쟁영웅기는 아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한 각각의 사람들이 영웅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모두가 영웅인 세상. 그런 이유로 캐릭터들은 이름 정도만 나올 뿐 그들의 과거, 배경 등 개개인의 스토리는 나오지 않는다. 심지어 파리어(톰 하디)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소멸시키고 나서야 얼굴이 등장하기에 이른다. 파리어와 민간인 어선 선장 도슨(마크 라이런스)이 모두가 영웅이 되는 세상을 만든 인물들을 대표하는 자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필자는 이들과 대조적으로 보이는 토미(핀 화이트헤드)와 도슨에 의해 구출된 공군(킬리언 머피), 이 두 명에 주목한다. 아마도 그들에게서 필자가 채우지 못한 나머지 반에 대한 원인 규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토미는 적을 직면하고 동료들과 재빠르게 도망친다. 군인의 생명이라고도 불리는 총까지 집어던지고 달리고 또 달린다. 결국 자신과 함께 있던 5~6명의 동료는 모두 사망하고 혼자 살아남는다. 죽음이 화살이 그를 피해 간 것은 바로 다음 해변가에서 한번 더 있다. 전투기 폭격이 시작하여 쑥대밭이 되어 가고 있는데 딱 그가 엎드려 있던 직전까지만 폭격은 이루어진다. 그는 한번 더 목숨을 연명한다. 지금까지는 타의에 의한(혹은 우연에 의한) 생명부지였지만 이제 토미는 점점 더 주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부상자를 데리고 호송선에 타기 위해 달리기도 하고, 다리 밑에 숨어 배에 몰래 탑승할 기회를 엿본다(결국 그 배는 폭발한다). 결국 또 다른 호송선으로 옮겨졌지만 그는 동료들과 떨어져 홀로 혹시 모를 공격에 대비해 배의 바깥쪽에서 추이를 살피고 있다(그 배 역시 어뢰의 공격을 받고 난파된다).


필자는 토미가 결코 파리어와 도슨 같은 행동을 하는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기 목숨만을 자신이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이것을 비판하려는 논지는 아니고 - 전시 상황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으므로 - 다만 '다르다'라는 점을 짚고 싶다. 그와 비슷하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다른 한 명은 도슨에게 구출된 병사이다(그는 심지어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도 왜 다시 덩케르크로 돌아가냐고 소리를 지르며 도슨의 배를 우회하려고 한다. 필자는 그 또한 비판하려는 논지가 아니다. 그가 그렇게 겁먹은 데에는 전쟁의 폭력성과 잔인성 때문이라는 것을 지레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어쨌든 그도 분명히 파리어, 도슨과는 이 전쟁에 대해 다른 입장에 있다.


이쯤에서 한번 인물들을 분류해본다. 보호하는 자 그리고 보호받는 자.




보호하는 자는 파리어, 도슨, 볼튼 사령관. 보호받는 자는 토미, 떨고 있는 공군, 위넌트 대령(제임스 다시). 이들은 다소 무리한 측면이 있지만 '짝'으로 분류가 가능한다.

파리어 - 토미. 토미의 최후 생명 연장은 결국 파리어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파리어의 전투기가 요격에 성공하므로). 토미가 마지막에 탈출하기 위해 몸을 숨기고 있던 난파선은 독일군으로부터의 방어가 구축되지 않은 위험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파리어가 최종 착륙하는 곳은 바로 그 즈음 어디라는 점에서 이 둘의 매칭이 더욱 그럴듯해 보인다.

도슨 - 떨고 있는 공군. 이 둘은 더욱 직접적으로 보호자, 피보호자라는 자타가 분명히 구분된 관계에 있다. 본토에 배가 닿고 공군과 도슨이 걸어가는 양방향의 갈림길은 그들의 관계의 결말로 보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위넌트 대령 - 볼튼 사령관. 물론 이들은 가장 분류의 경계가 모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본토로 탈출하는 배를 타는 것은 볼튼이고, 프랑스인들을 구출하기 위해 남겠다고 말하는 이는 위넌트 대령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둘도 필자의 분류법에 입각하여 짝을 이루고 있다.


보호하는 자들과 보호받는 자들은 연령이 다르다. 즉, 세대가 다르다. 보호하려는 자들은 모두 자신과 짝을 이루는 인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윗세대 그러니까 구세대에 속하다. 이제 영화의 마지막 기차 속에서 읽던 신문 기사(처칠의 연설문)로 다시 돌아가 보겠다. 이번 '탈출 작전은 구시대에서 신시대로의 태동의 상징 같은 것'이라는 멘트.

맞는 말이다. 영화 속 구세대(보호하는 자들)들은 새로운 세상을 위해 희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구한 것은 분명히 새로운 세상을 이끌 미래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런데 바통을 인계받은 새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들의 윗세대만큼의 희생을 해나갈 수 있을까? 아니 시대적 배경으로 본다면 이제 그들은 한참 윗세대의 윗세대가 되었을 텐데 잘 해나가고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한 명'의 중요성이라는 선대의 교육을 체감하고 있는가? <덩케르크>가 필자에게 준 '결여'는 여기에 있었다. 오롯이 희망으로만 가슴이 부풀어 오르지 못했던 이유 말이다.


★★★☆ (별 3개 반)

하나의 생명을 구하는 자는 세상을 구하는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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