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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Sep 23. 2017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지만

샤인(Shine)


흡사 <빌리 엘리어트>의 또 다른 결말이라고 할까? 물론 전후 관계를 따지면 <샤인>이 <빌리 엘리어트>에 비해 4년 앞서지만 두 영화는 닮은 듯 전혀 다른 행보를 가는 영화임에는 분명하다. 꿈을 펼치는 주된 장애물이 '부심(父心)'임은 동일한데, 한쪽은 예술의 가치를 모르는 지나친 무지(無知)가 문제이고(<빌리 엘리어트>) 다른 한쪽은 예술의 가치를 과하게 사랑하는 왜곡이 문제이다(<샤인>). 전자는 아버지를 끝내 설득시키지만, 후자는 아버지와 절연한다. 그래서 조금 더 비극인 쪽을 꼽으라면 <샤인>이겠다. <빌리 엘리어트>에 빌리 엘리어트(제이미 벨)는 난공불락이었던 아버지만 설득시키고 나니 가장 정력적으로 왕성한 시기에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이제 도약할 일만 남아있다. 반면에 <샤인>의 데이비드 헬프갓(제프리 러쉬 - 장년 시절 데이비드 헬프갓의 배우 명만 명기하겠다.)은 도약하기 직전에 무너지기 시작하여 몇 십 년을 허송세월을 보낸다. 그런데 우리가 원하는 청사진 쪽은 허구의 이야기이고, 안타까운 결말 쪽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물론 <빌리 엘리어트>도 필립 말스덴의 실화에서 착안한 이야기이지만 허구가 가미된 팩션이다).


이 논지는 무엇인가 하면 실상은 꼭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아름답지는 않다는 뜻이다. 혹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만개하는 시기는 내가 정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에서 자신이 다짐한 일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자신이 한번 가볍게 툭 던진 생각은 결국 이루고만 성준(유준상)처럼. 원래 삶은 원하는 방향으로 결코 흘러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언제 올지 모르는 발화의 지점을 위해 늘 최선을 다하고 살아라? 그런 진부한 이야기도 아니다. 어쩌면 '인생은 고통'이라고 말하는 영화일지도 모른다. 조현훈 감독의 <꿈의 제인>의 제인(구교환)이 '인생은 불행 속에서 잠시 동안 행복을 향유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비발디의 <세상에 참 평화는 없어라>가 영화에 두 번 흘러나오는데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의 울려 퍼짐은 주제의식을 명확화한다. <샤인>을 통틀어서 헬프갓이 가장 안온한 시기가 있다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일 것이다. 그 옆에는 자신의 영원한 조력자인 부인 질리언(린 레드그래이브)도 있고 화창한 하늘이라는 영화적 미장센도 평안함을 배가하고 이제 헬프갓은 아버지라는 트라우마도 극복한 것으로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 들려오는 비발디의 음악. 어쩌면 '세상에 참 평화는 없다'라는 어떻게 보면 삶에 대해 극 사실주의적인 심하게는 염세주의적인 관점. 우리는 시작부터 부가 흘러넘치는 사람들의 비극적 말로를 본 적이 있고, 어느 시점에 찾아온 갑작스러운 잭팟으로 점점 무너지는 사람의 이야기를 본 적도 있다. 주변에서든, TV 속에서든, 영화에서든 어딘가에서 보았던 나보다 행복해 보였던 사람이 알고 보면 불행했다는 이야기들. '알고보면 누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샤인>의 인생관이 완전히 동떨어진 이야기로 보이지는 않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에서이다. 씁쓸하게도.


'샤인(Shine, 1996년 作)'



헬프갓이 장대 빗속을 속옷과 바바리코트 하나만 달랑 걸친 체 달리는 것이 영화의 처음 시퀀스인데 그의 질주 본능에 대한 이유는 뒤에 붙는 플래시백 속에서 그러니까 시간여행 속에서 후술 된다. 다시 영화는 현재로 돌아와, 그가 비를 맞으며 도착한 곳은 찬란한 햇살이 쏟아지는 탁 트인 어느 공간이 아닌 분위기를 내기 위한 조명만이 밝혀져있는 어느 BAR이다. 결국 이것은 그의 인생과 조응한다. 안경에 맺힌 빗방울과 쏟아지는 장대비에 속의 그의 뜀박질은 결국 앞이 캄캄한 삶을 살아온 그의 인생의 압축판이며 도착한 곳에 있는 것은 거대한 희망의 광명이 아닌 조그만 희망의 불씨일 뿐이다.


과거에 헬프갓은 지금처럼의 정신분열 증세는 없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좀 주눅 든 면이 있었을 뿐 선천적인 질병은 없어 보인다. 그의 병은 후천적인 증세라는 뜻인데, 영화적으로는 그가 경련을 일으킨 시점이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완주한 직후로 그려져 있다. 물론 이것이 실제 고증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곡은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어렵다고 정평이 나있는 곡이기도 하고 신체적인 조건이 갖추지 않으면 섭렵하기가 힘든 곡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곡을 도전하는 것은 다소 '미친 짓'처럼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고, 그것이 완성되는 순간은 '신화적'으로까지 그려지고 있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곡은 어렸을 때부터 헬프갓의 아버지 피터(아민 뮬러 스탈)의 소명곡이기도 했다. 마치 자신의 꿈을 아들의 꿈으로 전이시킨 곡이랄까? 헬프갓이 이 미친 짓을 도전한다는 것은 예술가로서의 어느 경지에 도달하고 싶은 타고난 기질적인 측면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알게 모르게 조기교육 속에 녹아있는 아버지의 억압의 상징이기도 하다. 즉, 헬프갓이 후천적 정신질환을 앓는 이유는 예술가의 성장 속에 필수불가결한 고뇌의 극단적인 결과이기도 하면서 아버지라는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트라우마는 결국 예술을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아버지로부터 촉발된 것임으로 다시 한번 파고들면 '예술에 대한 애정'이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샤인>은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현재를 이겨내자는 진부한 교훈극은 아니다. 사실 정신질환 이후 시점부터 헬프갓이 자신의 필사의 노력을 통해 쟁취해나가는 것은 거의 없고 본인의 세계 속에서 그냥저냥 살아가고 만 있는데, 우연에 가까운 상황들에 의해 조금씩 빛을 보게 된 것이라 보는 게 맞다. 그래서 언급했던 것처럼 이 영화는 잔인하게도 예술가의 지적인 고뇌는 필수불가결한 길이라는 처연한 측면의 영화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샤인> 속에서 피아니스트의 마지막 단계로 등장하는 라흐마니노프도 우울증을 앓았던 그리 평탄하지 않는 삶의 음악가이기도 했고, 언급했듯 손의 크기가 어느 이하가 되어버리면 그의 <피아노 협주곡 3번>에 도전할 엄두도 내지 못하니 어쩌면 모든 예술가는 열등감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는 않을까? 일반인들 보다 더욱?




영화의 하드웨어적인 이야기를 잠깐 해보겠다. 음악과 실화가 섞여있는 소재를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흐름으로 이끌어 나갈 것인가 고민이 많을 것이다. 뛰어난 테크닉으로 음악적 경이로움을 선사할 것인가?, 아니면 실화를 고증하는 데에 힘을 쓸 것인가? 조금 더 위대한 생각을 한다면 영화 속에 인생의 아이러니를 담아 볼 것인가? 스콧 힉스 감독은 글쎄.. 분명히 여러 갈래의 시도는 하고 있지만 어느 것도 만족스러울 만큼 완벽히 잡아내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쾌거가 있다면 모차르트, 리스트, 라흐마니노프, 비발디까지 그들의 음악을 돌비(Dolby) 사운드로 들을 수 있다는 즐거움 정도랄까? 하지만 이것은 낭만주의 음악가들의 음악의 위대함 때문이지 영화가 그 음악을 배가 시켰다고 보기는 힘들다. 차라리 기술이 배가 시켰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다. 결론적으로 <샤인>은 평이한 드라마로 귀결된다.


세상은 '원래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야'라며 아직 꿈을 펼치지 못한 이들의 어깨를 토닥거리곤 한다. 그런데 문제는 '동이 틀 무렵' 의 시점을 어느 누구도 자신이 직접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빌리 엘리어트처럼 시기적절하게 인생의 태양이 떠오를 수도 있고 데이비드 헬프갓처럼 한참 동안 암흑 속에 버둥거리고 나서야 느즈막하게 태양이 어슴푸레 보일 수도 있다. 참 씁쓸하게도.



★★★ (별 3개)

동트기 직전이 가장 어둡다지만 그 누구도 동틀 시점을 선택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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