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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Sep 30. 2017

다시 BORN '기쿠지로의 여름'

죽여주게 웃길 줄 아는 남자가 만든 하염없이 눈물 나게 하는 영화


어쩌면 <기쿠지로의 여름>은 기타노 다케시의 필모그래피 중에 가장 '그' 답지 않은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소나티네>를 최고작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비>를 최고작이라고 하며 가끔 <키즈 리턴>에 엄지를 치켜세워주는 이들도 있지만 이 영화만큼은 범작 혹은 잘해봐야 역작 정도라는 평을 받아왔고 최고작이라고 말하는 이는 본 적이 없다(물론 모집단은 영화평론가들로 국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에게 <기쿠지로의 여름>은 온몸 바쳐 비호하고 싶은 영화이다. 마치 정성일 평론가가 그의 저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책머리에 장 뤽 고다르의 <기관총 부대>에 바친다고 써놓았던 것처럼, 혹은 이동진 평론가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를 자신의 올 타임 베스트에 꼭 끼워 넣었던 것처럼. 영화광들에게는 누가 뭐래도 꽃보다 아름다운 자신만의 영화가 존재하는 법이다. 이 영화가 필자에게 그렇다.


어떤 영화에 순정을 받치게 되는 순간은 정말 훌륭한 걸작이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 감독, 배우이기 때문에 등이겠지만 때론 '타이밍' (그러니까 '우연' 아니 어쩌면 만날 수밖에 없었던 '운명')이 좌지우지하는 신비의 체험일 때가 있다. 영화와 만나게 되는 시대의 상황, 계절, 주변의 메커니즘, 내면의 우주 등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평소에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이성의 헤어 나올 수 없는 매력에 매료되어버린 순간처럼. 이 영화를 만난 순간이 필자에겐 그런 순간이었다. 더불어 필자의 감독 리스트에 기타노 다케시를 끼워 넣은 순간이기도 하다.


그의 태생은 개그맨이었다. 개그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영화란 무엇이냐?라는 질문만큼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때론 무례하기까지 한 질문일 텐데, 필자는 문득 몇 년 전 한국 개그계의 대부 이경규 씨가 예능에 대해 말했던 것이 떠오른다. 'JUST FUN'. '웃기면 장땡'. 그럴까? 그럴 수도. 그런데 필자는 장인이 되려면 한 가지 요소를 더해야 완벽해진다고 생각한다. '남을 울리는 능력'. 필자가 보기에 다케시는 딱 그런 인간이다. 죽여주게 웃길 줄도 알면서 하염없이 눈물 나게도 만드는 그런 사람. 인간의 희로애락에 통달한 자. 그의 영화에는 늘 비극과 희극은 접해있다. 물론 이것이 다케시만의 장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희비의 쌍곡선은 많은 훌륭한 감독들의 영화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이기에. 예를 들면 코엔 형제의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바람에 날려 친구의 잿더미를 뒤집어쓴 제프리 레보스키(제프 브리지스)처럼, 말하자면 봉준호의 <괴물>에서 괴물이 한강변에서 나자빠졌던 것처럼. 많은 레퍼런스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머가 필자에게 강하게 와닿는 것은 어쩌면 '코드'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야구공을 던져 달라는 사람들에게 허공으로 던지며 벙 찌게 만드는 기묘함(<하나-비>), 자토이치(기타노 다케시)가 맹인이 아니었다는 기상천외한 설정을 벌인 한판의 거대한 버라이어티 쇼(<자토이치>). 이 코드가 다수에게 통(通) 한다고 하진 않겠다. 확실한 것은 필자와는 완벽한 궁합. 그런 면에서(이것도 모든 훌륭한 감독의 특징이지만) 다케시의 영화는 다케시 밖에 만들 수 없다. 그의 영화와 비교될 수 있는 영화는 또 다른 그의 영화뿐이다.


'기쿠지로의 여름(Summer Of Kikujiro, 1999년 作)'



'엄마 찾아 삼천포'라. 영화의 포스터 말이다. 전혀 틀린 얘기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문장의 주어이다. 누구의 여행길인가의 문제. 누구를 위한 로드무비인가에 대한 문제. 처음엔 당연히 마사오(세키구치 유스케)의 길이었는데, 어느 순간 뒤돌아보니 기쿠지로(기타노 다케시)의 길로 도치되어 있다. 영화의 제목은 <마사오의 여름>아닌 <기쿠지로의 여름>이다. 결국 마지막에 호명당하는 것도 바로 기쿠지로이지 않은가. 어쩌면 기쿠지로는 마사오의 그릇된 성장의 예이다.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는 성장 배경이 공통적이고, 그들이 살고 있는 도시의 안온하지 않음이 유사하다. 먼저 부모 없음의 문제. 부모 없이 할머니의 손에서 홀로 커가는 마사오는 지금은 순수하고 맑은 아이이지만 이 삭막한 도시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커간다면 어떤 사람으로 귀결되어 있을지는 모른다. 주먹밥 한 덩이, 홀로 상 앞에 앉아 밥을 먹는 마사오의 등. 그 공허함을 아무도 채워줄 수 없기에.

다음은 도시의 문제. 마사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마사오와 친구 유스는 하교를 하며 도란도란 방학 계획에 대해 나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시장 골목 구석에 밤새 술에 찌든 것 같은 노숙자가 누워있다. 바로 뒤의 쇼트, 그들이 가려던 길목에는 불량배들이 진을 치고 있다. 이 아이들은 딱히 으슥한 곳을 찾아다닌 것도 아니고, 야밤에 싸돌아 다니는 비행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이 도시는 아이들을 두 팔 벌려 안아주기에는 녹록지 않아 보인다. 밤이 되면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변태 아저씨(무서운 아저씨)를 만나기도 하고, 기쿠지로에게 이끌려 도박, 유흥주점, 문신 등을 체험하며 자신도 모르게 내적인 충격을 받기도 한다(이 충격은 소년의 악몽으로 한편의 연극처럼 형상화된다). 이대로 라면 야쿠자라기보다는 한량에 가까운 지금의 기쿠지로의 모습이 되어있진 않을지. 이 어둠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한여름 낮의 꿀 같은 미장센 속에 같이 녹아 있다는 아이러니는 더욱 현실적이다. 현실에서는 도시의 불량함은 밤의 전유물이 아니기에.

감독이 혹은 영화가 마사오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마지막 '캠핑'시퀀스 일 것이다. 폭주족 같은 난폭한 외향을 가졌지만 모자라게 보일 정도로 순수한 형들, 글을 쓴다는 낭만의 방랑자. 아이를 위해 그의 눈높이에서 놀아줄 수 있고, 밤하늘에 수놓은 별자리를 보며 별자리의 전설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어른들이 있는 세상. 지금 마사오에게 필요한 세상은 바로 이런 세상이지 않을까? 히사이시 조의 <SUMMER>와 함께 천사 날개를 팔락거리면 달려가던 영화 초반부의 마사오는 천사 그 자체다. 우리들의 천사가 자라나는데 전혀 무방한 어른들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염원하는 것일 수도.




필자가 다케시 영화에서 특히 좋아하는 점은 한 쇼트 뒤에 잠시 정지한 찰나의 여유 혹은 여백인데, 이 잉여 속에서 그는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일까? 아니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필자는 이 시점에서 다시 왜 <마사오의 여름>이 아닌 <기쿠지로의 여름>인가를 묵고해본다. 혹시 다케시는 이 여행을 통해 결국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은 혹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 어른들이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작별 인사를 하고 마사오와 기쿠지로는 정 반대의 방향으로 향한다. 아마 키쿠지로는 내일이 되어도 똑같은 한량 같은 삶을 살 것이다.

그렇다면 마사오는? 슬로가 걸린 첫 장면은 알고 보니 마지막 장면의 연속된 달리기였다(즉 첫 장면은 여행을 다녀온 후의 마사오의 모습이었다). 기쿠지로가 될뻔했던 마사오는 그렇게 천사가 되어 달려나간다. 기쿠지로의 세대는 이름만을 남긴 체 반대 방향으로(그러니까 뒤안길로) 물러나고 있다. 이제 마사오의 세대가 일본을 채워 나갈 것이다. 과연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의 마사오들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왠지 측은하고 처연했던 기쿠지로의 마지막 표정이 걸린다.


★★★★★ (별 5개)

죽여주게 웃길 줄 아는 남자가 만든 하염없이 눈물 나게 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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