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운전사>
'직업윤리'라는 단어는 '윤리'라는 어휘가 들어있어서 그런지 왠지 소수의 구성원만이 지켜나갈 수 있는 숭고한 어떤 것이라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왜 그런 것인지(혹은 그것이 옳은 것인지) 필자는 판단이 안되지만, 추측건대 '도덕'이라는 잣대를 들이밀면 대게 이상적인 수준의 것들을 생각하게 되기에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이 글에서만큼은 직업윤리라는 단어에 대해 조금 더 가볍게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에서 표종성(하정우)이 정진수(한석규)에게 왜 이렇게 필사적이냐고 묻자 '이게 내 일이니까'라고 말했던 것처럼. 담대한 취지, 필사의 책임의식 등의 티 없이 맑은 청춘 같은 이유 말고 그것이 지금 자신의 일이니까, 삶이니까 하는 것 혹은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삶의 역군으로서의 때 묻은 이유. 어쩌면 이것이 현실적인 범위에서의 직업윤리이지 않을까? 예를 들어 학생들은 공부를 하고(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군인은 나라를 지키고, 기자는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하고, 택시운전사는 손님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주는 등.
영화 <택시운전사>에서는 필자가 헤아려 본 것만 약 5번의 직업윤리가 궤멸된다. 서사의 순서대로 나열해보면 먼저 대학생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거리로 뛰어나와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다. 비싼 등록금을 냈던 부모님 혹은 누군가의 바램을 뒤로한 채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그들은 학생의 본분을 상실했다. 다음은 군인들. 군인들은 국가의 안녕을 위해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수호해야 하는 자들인데 왜 도무지 내부의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진정 총구가 겨냥하고 있는 자들이 내부의 폭도들이었다면 (크게 양보해서) 그럴 수도 있을까?라고 한번 더 자문해 보겠지만은, (실제 대한민국의 역사를 고증하지 않더라도) 영화에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해보면 그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당하고 있는 민간인들은 죄가 없었다. 셋째는 기자들. 기자들은 현재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사(大事)를 객관적으로 더 정확하고 더 널리 알려야 하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기자로서의 정체성을 망실한 기자들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네 번째는 택시운전사 김만섭(송강호). 그는 10만 원을 받고 광주에서 김포공항까지 왕복하겠다고 했던 고객 위르겐 힌츠페터(토마스 크레취만)와의 약속을 뒤로한 채 슬그머니 광주를 빠져나온다. 마지막은 광주의 택시운전사들. 앞에 언급한 예들은 그래도 자신의 업무 내적인 영역에서의 일탈이었다면, 정부의 하수인들을 상대로 한 그들의 카체이싱은 가히 압권이다. 택시운전사에게 '택시'라는 것은 자신들의 전 재산이자 삶을 유지시켜주는 경제적 보루일 텐데,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직업윤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로 자신들의 전부인 택시를 내던지며 총과 지프차를 상대하려고 한다. 도대체 자신의 삶과 가족들보다 중요한 것이 무엇이기에.
영화 속 가시적인 팩트만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필자는 이 의식을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조금 더 밀고 나가보겠다. 결국에 이 수많은 사회 구성원들의 직업윤리의 비틀림은 결국 하나의 거대한 직업윤리 파괴에서 비롯되어 작동되는 메커니즘이지는 않은가?에 대한 고찰. 즉, 오작동의 방아쇠의 주최는 당시의 통수권자라는 뜻이고 영화의 배경이 광주 민주화 운동이기에 그것이 누구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다. 그러니까 필자는 언급한 5번의 직업윤리의 파괴가 '어쩔 수 없었다'라는 입장이다. '왜 그렇게 시민의식이 비 문명화 되었느냐?라는 지탄이 아닌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이해 혹은 탄식.
'택시운전사(A Taxi Driver, 2017년 作)'
잠시 딴 소리. 택시운전사라는 직업은 어쩌면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를 할 때 꽤 적합한 직업인 것 같기도 하다. 하루 기준 가장 많은 이동을 하는 직업군에 속하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하루 기준 남녀노소를 불문한 가장 많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기 때문에. 즉 세상의 넓이와 깊이를 두루 경험하고 있다고 할까? 그들이 주인공이 된다면 시대상을 보여주는 설정 쇼트들도 매끄럽게 붙을 수 있고, 자신이 속한 군집에 따른(지역, 직업, 나이, 성별 등) 시대를 대하는 온도차에 대한 설명도 캐릭터들의 대사에(혹은 모습에) 자연스럽게 용해될 것이다. 무엇보다 직업에 대한 근본적인 인상 자체가(이것은 문제적 발언 혹은 무지에서 비롯된 발언일 수는 있으나) 서민이라는 점이 가장 적합한 이유이지는 않을까? 시대에 맞서지도, 개척하지도 않는 오직 하루하루 자신의 삶이 가장 중요한 소시민들의 눈에 오히려 시대가 객관적으로 보일 수 있기에.
그래서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Taxi Driver>에서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의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기괴한 행보는 1970년대 후반의 뉴욕 빈민가의 시대상황적 맥락으로 설명이 가능하였고, 짐 자무쉬 감독의 탈무드 혹은 이솝우화와 같았던 <지상의 밤>에서는 각기 다른 나라에서의 모든 에피소드가 택시 안에서 벌어졌다(참고로 이 영화는 옴니버스 영화이다). 그럼에도 이물감 따위는 없었다. 이런 레퍼런스들에 기인하여 볼 때 시대극과 택시운전사의 결합이라는 설정'만'은 꽤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독일 기자 힌츠페터를 집중 조명했어도 또 다른 영화가 나왔겠지만.
필자가 '만'이라고 굳이 방점을 찍는 이유는 <택시운전사>에 보낼 수 있는 박수는 그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나마 쾌거라 하고 할 수 있는 '설정'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니 오롯이 장훈 감독의 공으로 돌리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 만약 필자에게 이것 이외의 유의미를 찾으라고 몰아세운다면 오로지 '송강호의 얼굴'뿐이라고 답하겠다.
<변호인>, <사도>, <밀정> 그리고 <택시운전사>까지 배우 송강호는 어느덧 시대의 맥이 담긴 얼굴을 갖은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에 연기 잘하는 배우를 열거하라면 바로 머릿속에 여러 인물들이 떠오르지만, 자신의 브랜드 네임 이상의 어떤 아우라가 있는 배우는 송강호 말고는 아직은 떠오르지 않는다(이것도 주관적인 입장). 필자는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라는 문장에 동의하는 쪽인데, 송강호는 어느덧 그런 필자의 가치관을 가볍게 비웃고는 저 멀리 나아가는 배우가 되어가고 있다(최소한 필자에게는). 사실 <택시운전사>는 서사에 따라 변화하는 김만덕의 표정, 태도 등만 유심히 보아도 맥을 짚어나아가는데 어려움이 없는 영화이다.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이 영화는 김만섭을 따라가는 드라마 말고는 딱히 볼게 없는 영화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시 직업윤리의 이야기로 회귀. 필자는 서두에 직업윤리에 대해 너무 높은 수준의 잣대를 들이밀면서까지 생각하지는 말자고 제안했다. 힌츠 페터가 일본에서 광주로 오게 될 때도 '어떻게 그런 일이?'라는 뜨거운 공분이 아닌, '사건이 있으니 가야지'라는 차가운 기자 의식에 의거한 것이었듯이. 그런데 필자는 여기에 한가지 제안을 추가하겠다. '직업윤리에 대한 투철함은 - 마치 세상이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지 않듯 -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자신이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자라면 그리고 그 결정이 자신이 소속된 곳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일수록 투철함은 배가 되어야 한다. 즉, 권한과 비례적인 관계. 만약 투철함에 등수를 매길 수 있다면 권한이 많아질수록 선두에 위치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선두가 무너지면 선두의 직접적인 자장 안에 있는 자들은 당연히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전혀 생각지 않던 곳에서 피해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택시운전사>에서처럼. 말하자면 '나비효과'.
역사의 가슴 아픈 희생의 '덕'을 보고 살고 있는 지금 세대의 필자가 감히 가타부타 언급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가통지사(可痛之事)에 대한 결정적인 원인은 최종 결정권자의 직업윤리의식에 대한 현저한 결함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 (별 3개)
최종 결정권자의 직업윤리의식에 대한 현저한 결함이 몰고 온 나비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