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앰 히스 레저(I Am Heath Ledger) [브런치 무비패스]
솔직히 말론 브란도쯤 되는 영화사적 굵직한 거장의 배우도 아니고, 로버트 드니로 혹은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같이 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자신의 인장이 찍힌 무수한 걸작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히스 레저'인가? 물론 어느 누구의 인생도 무가치한 인생은 없겠지만은 과연 그가 본인의 전기 영화가 등장해야 될 정도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나? 혹시 막 떠오르고 있던 태양의 갑작스러운 몰락에 의해 발현된 환상 같은 것이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이것이 필자가 영화를 관람하기 전 품은 첫 번째 의문 혹은 의구심이었다.
의문과 의구심을 조금 더 밀고 나가겠다. 히스 레저를 범세계적으로 각인시킨 작품은 <다크 나이트>라는 데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필자의 눈에는 그것이 유작이 되면서 그를 다소 신격화 시켜버린 측면이 존재하였고 그로 인해 많은 대중들과 언론들에게 그가 과대평가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하였다. 이것이 이 영화를 보기 전 필자가 히스 레저라는 인물에 대해 품고 있던 얄팍한 생각이었다. 어쩌면 선입견 혹은 배배 꼬인 단견.
다행스럽게도 영화를 본 후 필자의 우려는 잠식되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가 입지전적인 인물이냐 아니냐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영화였다고 할까? <아이 앰 히스 레저>는 한 명의 배우로서의 성취를 경하하려는 영화도 아니고, 한 인간을 미화하여 영웅으로 둔갑시키려는 영화도 아니며, 한 요절한 예술가를 왜곡하여 신격화 시키려는 영화도 아니다. 이 영화의 목적은 단지 한 명의 자유로운 영혼이 어떻게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었나에 대해 한 발자국 떨어져 반추하는 영화이다.
어떤 수식어를 붙어주면 적당할까? '마초적 남성성과 섬세한 여성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자'로 보면 어떠할까? <브로크백 마운틴>의 카우보이 게이, 에니스 델마라는 캐릭터가 탄생한 것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방랑하는 예술가'로 봐도 좋을 것이다. <아임 낫 데어>에서 밥 딜런이라는 규정할 수 없는 세계의 일부가 되는 데에 이런 그의 속성은 안성맞춤이었다. 단순하게 생각해서 '해맑고 에너지 넘치는 소년이자 청년'으로 본다면 어떠할까? <다크 나이트>에서 늘 기괴하게 웃고 있는 희대의 캐릭터 조커가 재창조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순수함과 절대 악의 미묘한 동질성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히스 레저는 단 하나의 속성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다채로운 사내이다. 마음속 깊은 곳에 다차원의 우주를 품고 있는 자. 필자는 그를 단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Just Heath Ledger.
'아이 앰 히스 레저(I Am Heath Ledger, 2017년 作)'
28세라는 꽃다운 나이에 져버린 사내를 영화화한다고 하면 우선적으로 '정보량'이라는 측면에서 벽에 부딪힐 공산이 크다. 그런데 웬걸? 그가 포착된 혹은 그가 포착한 무수한 영상과 사진들이 쏟아져 나와 이 영화를 견인해가는 근원적 요소들로 기능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영화를 채워 나갈 수 있었던 방대한 자료의 존재 자체가 히스 레저라는 사내의 중요한 본질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짧은 인생 동안 시종일관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본인을 포함한 그리고 본인을 이루는 모든 세상을 포착하려고 했던 히스 레저. 도대체 그는 무엇을 그렇게 담고 싶었기에 병적으로 카메라에 집착했던 것일까?
힌트가 될만한 이야기는 그가 영화에 임하는 자세로써 추구했던 것이 '진실'이었다는 그의 지인의 인터뷰이다. 그러니까 '실재'를 추구했던 사내. 그가 17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학교를 떠나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선언을 했던 것도 어쩌면 '세상은 진실되지 않다'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떠난 소년은 어디에도 깊게 뿌리내리지 않고 세상이라는 정글을 정처 없이 헤매고 다닌다. 아니 즐기면서 모험을 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필자는 그가 추구했던 진실 혹은 실재의 결과물이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단지 그가 추구했던 진실을 향한 '과정'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아이 앰 히스 레저>에는 그가 연출한 뮤직비디오 3편이 소개된다(N'fa의 <Cause An Effect>, Ben Harper의 <Morning Yearning> 등). 물씬 느껴지는 전위적 혹은 추상적 화면들. 이 지점에서 인용해 봄직한 피카소의 작품 <화가와 모델>(물론 이 예는 글을 쓰며 막 떠오르는 작품을 예로 든 것일 뿐이다 혹여나 다른 자리와 다른 글이라면 다른 예를 들 가능성이 높다).
복잡한 관념들을 제거해가면서 자신의 연인 마리 테레즈 발터의 뜨개질 하는 모습을 직선과 곡선의 연속체에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작품(아래 사진 참조). 결국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순수한 이미지의 힘만을 포착한 그림. 바꿔 말해 피카소의 작품은 추상화를 한 것이고, 결국 추상화라는 것은 진실의 가장 순수한 형태를 탐닉하기 위한 '과정'이다. 이 피카소의 <화가와 모델>에 녹아 있는 의식의 흐름과 히스 레저의 뮤직비디오의 의식의 흐름을 같은 자장 안의 것으로 보면 어떠할까? 물론 필자의 얄팍한 지식으로부터 기인한 비유일 것이다. 다만 논지는 이렇다. 필자의 눈에는 히스 레저의 뮤직비디오가 품은 추상성이 왠지 그가 추구했던 저 넘어의 진실을 향한 악전고투처럼 보인다는 것.
또 다른 예 첨언. 그가 카메라에 담은 많은 영상의 인물들과 사물들은 클로즈업 되어 있다. 클로즈업이라는 기능의 근원은 포착된 대상에 대한 인간의 소유욕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혹시 히스 레저의 그와 같은 행위는 눈에 직시되는 이미지 이면에 진실을 소유하고 싶었던 소유욕으로부터 발현된 것은 아닐까? 아니. 그의 육감은 이미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를 진실을 향하여 일종의 예외적 만유인력의 법칙을 작용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약 3번 정도, 히스 레저는 자기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들고 360도 회전하기 시작한다. 이 회전의 첫인상은 세상 속 진실을 찾으려는 소년의 개구쟁이적 행동으로 보였다. 조금 더 상상력을 가미해서 보니 그가 회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회전시키고 싶은 자의 발악적 행위로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필자는 이 회전을 '윤회'를 위한 제의라는 맥락으로 보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많은 팬들의 염원일 것이다. 현실의 공간에서는 사라졌지만 더욱 장대한 무엇인가로 재탄생하리라는 그의 날갯짓. <아이 앰 히스 레저>는 끝내 바다와 하늘을 카메라에 담아낸다. 진실을 추구하던 예술가는 결국 바다와 하늘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러 있다는 듯이.
히스 레저는 본질적으로 방랑자적 세포가 다분한 보헤미안이면서 아티스트였고, 음악을 사랑한 청년이자 새로움을 추구한 배우였으며, 늘 주변에 왁자지껄 사람들과 함께해야만 하는 모두의 형제였다. 무엇보다 진실이 무엇인가를 탐닉하던 한 인간이자 감독이었다. 그곳에는 진실이 보이십니까?
★★★ (별 3개)
진실을 추구한 예술가, 바람과 하늘이 되어 우리 곁에 머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