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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Oct 22. 2017

다시 BORN '밀러스 크로싱'

인생은 B와 D 사이 C, 그리고 F


<밀러스 크로싱>은 필자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첫 번째 질문. 왜 톰(가브리엘 번)은 자신이 모시는 우두머리 리오(알버트 피니)에게 솔직한 고백을 했을까? 당신의 연인 버나(마샤 게이 하든)는 사실 나와 내연관계라고. 두 번째 질문. 왜 톰은 버나의 동생 버니(존 터투로)를 밀러스 크로싱에서 살려주었는가?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답은 다음과 같다. 첫째, 버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연하자면 버나에게 청혼한다는 리오의 얘기를 듣는 순간 톰의 마음을 가득 채우는 질투심. 같은 맥락으로 버니에게 총구를 들이대려고 하니 문득 떠오르는 버나의 얼굴. 두 번째, 자신이 속한 조직과 보스의 안녕을 위한 큰 판 축조. 리오의 마지막 대사처럼('캐스퍼에게 접근하기 위해 나에게 싸움을 건 것이지?') 그의 머릿속 작전 같은 것들. 세 번째, 단순한 배신. 아일랜드계에서 이탈리아계로의 권력 이동이라는 시류의 흐름에 편승하기 위함. 마지막, 톰의 도박꾼으로써의 근본적인 '기질'.

톰은 영화 속에서 얼굴이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라자레로부터의 도박빚 독촉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박을 행한다. 조직원 러그(Salvatore H. Tornabene)가 죽었다는 신문기사 1면보다도 뒷면 어딘가에 있는 도박의 결과에 대한 기사가 더 중요한 사내이기에. 계속 잃는 것을 보니 자질은 없어 보이나 기질만큼은 명백하다. 어쨌든 언급한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이유들이 소용돌이치며 작동한 결과가 그의 선택의 이유는 아니었을까? 본인도 왜 그랬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는 것 같다. '자기 행동을 다 설명할 수 없지 않아요?'라고 리오에게 반문하지 않았던가.


샤르트르의 뻔한 구문 한 문장. '인생은 B(irth) 와 D(eath) 사이 C(hoice)'이다. <밀러스 크로싱>은 여기에 한 가지를 추가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우연', '제3의 개입', '초월적인 어떤 것의 작동', '나도 몰랐던 내 마음속의 우주', '운'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것 혹은 '변수'라고도 일컫는 것. 인간의 삶은 숨을 쉰다, 안 쉰다를 시작으로 매일매일 선택의 사이클 속에 돌아간다. 무리하게 비유하면 이지선다형 문제 풀이. 필자의 생각엔 아마도 톰의 선택이 이런 메커니즘의 자장 속에서 이루어진 것 같다. '삶은 양 갈래의 길이 아니라 세 갈래의 길이다.'라는 코언 형제의 세계관 속에서.


이 세계관을 증명하기 위해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타이틀보다도 먼저 화면에 얼굴을 들이미는 캐스퍼(존 폴리토). 그는 리오에게 버니를 내놓지 않으면 앙심을 품겠다는 언사를 내비치고 떠난다. 톰은 버니를 내놓자고 설득하지만 리오에게 먹혀들지 않는다. 결국 중절모를 푹 눌러쓰며 리오에게 말한다. '버니를 잃으면서 얻는 것과, 캐스퍼를 약 올리면서 잃는 것을 선택하시오.' 언뜻 보면 갱스터의 우두머리로써 할 수 있는 답은 이 두 가지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한 영화의 답은 무엇인가? 바로 다음 장면. 어느 숲 속(아마도 밀러스 크로싱)의 수직으로 하늘을 비추는 카메라의 끊이지 않을 것 같은 무빙. 높은 하늘을 바라보던 카메라는 가장 땅과 가까이 다가와 중절모를 비추고, 그 중절모는 너풀너풀 바람에 실려간다. 마치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해도 소용없다는 듯이.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되는 문제로 보이지만 비가시적인 것이 개입되는 순간 답은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듯이. 당신은 그만큼 무력하다는 듯이. 즉, 영화가 준 답은 이지선다형 문제에서 3번. 이 논리의 흐름을 유지한 체 더 밀고 나가 바로 뒤에 붙는 시퀀스까지 살펴보자. 밤새 도박과 술에 취해 자신의 모자까지 잃고 잠에서 깬 톰. 그가 찾아간 곳은 '3'호실에 살고 있는 버나. 어쩌면 버나의 존재는 톰에게 두 가지 보기의 문제를 전복시키는 세 번째 보기일지도 모른다. 

 

두 번째 증거 찾기. 밀러스 크로싱에서 톰에게 무릎 꿇고 살려달라는 버니의 울부짖음을 떠올리자. 그 둘을 숲 속 어딘가에서 바라보는 듯한 투 샷의 인서트. 설정 쇼트인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문득 드는 추측은 혹시 '시점 쇼트'이지는 않을까?(이런 쇼트는 톰이 에디 데인에게 밀러스 크로싱으로 끌려왔을 때 한번 더 등장한다). 그렇다면 시점의 주체는 톰이 버니를 살리기로 결정한 순간 작동한 무엇이지는 않을까? 이 기묘한 시점 쇼트가 필자가 생각한 두 번째 증거이다. 이 장면 또한 조금 더 밀고 나가겠다. 버니가 달아난 뒤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톰의 바로 그 위치에 캐스퍼의 졸개 틱택(알 맨치리), 프랭키(마이크 스타)가 오버랩 된다. 그리고 우리의 눈에는 길고 곧게 뻗은 밀러스 크로싱의 도로가 보인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질문을 해보고 싶다. '밀러스 크로싱'이라는 공간은 대체 무엇인가? 이 공간은 세 갈래의 길로 나뉜다. 차로 이동할 수 있는 그러니까 우리가 자연스럽게 선택할 수 있는 양 갈래의 길. 이 양 갈래의 길 어디쯤에서 수직으로 뻗어 있는 숲 속의 길. 금지된 성역처럼 보이는 이 길. 숲이 울창해 모호한 느낌이 들고, 죽음과 삶이 공존하게도 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간. 밀러스 크로싱의 숲은 우리의 삶에 불쑥 찾아오는 세 번째 보기에 대한 형상화이지는 않을까?


둘 중 하나의 선택을 해나가야만 하는 삶, 그 와중에 선택할 수 없는 변수의 개입. 필자는 이것이 <밀러스 크로싱>의 동력이자 코엔의 세계관으로 보인다.


'밀러스 크로싱(Miller`s Crossing, 1990년 作)'


운명의 장난, 제3의 개입은 <밀러스 크로싱> 속에 자주 얼굴을 비춘다. 캐스퍼의 수하들이 리오의 가택에 침입했을 때 만약 리오의 부하 데이나의 담뱃불이 신문에 옮겨붙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침입을 눈치챘을 것이며, 버니가 밍크(스티브 부세미)의 시체를 자신의 시체로 둔갑시켜놓지 않았다면 어떻게 톰은 목숨을 건졌겠는가.

그러면 운명을 회피할 수 있느냐? 혹은 전복시킬 수 있느냐? 필자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영화 속 두 명의 인물을 살펴보겠다. 먼저 톰. 톰은 영화에서 가장 지적으로 보이는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삶의 불가해한 지점을 어렴풋이 체감하고 있는 것 같다. 그 운명의 장난을 알기에 꾸준히 도박을 행하는 것일 것이고(운명이 자신의 손을 들어 줄 수도 있다는 믿음), 캐스퍼에게 반강제적으로 잡혀왔을 때도, 버니가 자신의 집에 들어와 소파에 앉아있을 때에도 심지어 리오에게 쥐어터질 때에도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그는 늘 식은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무심한 얼굴이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코엔 형제는 멋들어진 전통적인 남자 주인공의 자리를 내어 주지는 않는다. 밀러스 크로싱 숲 속에서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토악질을 해대고, 되돌아온 버니를 처단하기 위해 창문을 뛰어내려 달려가다가 어이없게 나자빠지면서 차마 고개를 들기 민망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아무리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한들 제아무리 그가 머리를 좀 쓴다고 한들 그 또한 결국은 우연과 필연의 카오스 속에 살아가는 한낱 인간일 뿐이라는 멍에는 평등하게 적용된다. 심지어 그가 자신에게 닥친 상황들을 컨트롤하기 위해 여러 덫들을 놓기 시작하는 순간순간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수'를 쓰기 시작한 행위를 한 후에는 항상 얻어맞으며 모자가 땅으로 나가떨어지게 된다. 마치 네가 머리를 써봤자 대세를 거역할 수 없다는 듯이. 결국 그가 살아남은 것도 자신이 짜놓은 판들이 자신이 생각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주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관심 인물은 캐스퍼. 톰 다음으로 이 삶의 생태를 인지하고 있는듯한 사람은 (필자가 보기엔) 캐스퍼.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 왼 주먹과 오른 주먹 중 어느 손에 페니(동전)가 들어있을까 맞춰보라고 한다. 두 가지로 보이지만 사실은 세 가지 선택지. 오른손, 왼손 그리고 재선택을 요구하면서 흔들거리는 왼손. 아둔하게도 그의 아들은 세 번째 선택지는 파악조차 못한다. 후에 다시 한번 아들이 등장해 징징 거리는 순간에는 따귀를 올리며 더욱 직접적으로 대사를 날린다. (톰을 가리키며) '이 아저씨처럼 조용히 지적으로 행동해봐!' 캐스퍼가 톰을 얻기 위해 그를 반강제로 납치한 것도, 자신의 최측근 부하 에디 데인(J.E 프리맨)의 명확한 증거 제시에도 청맹과니가 되어버린 체 톰을 싸고도는 것도 세상을 조금 더 알고 있는 자를 붙잡아야 된다는 본능 같은 것 때문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의 어설픈 발버둥질의 결과는 무엇이었나?

결론적으로 <밀러스 크로싱>은 운명을 예측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에 부정적이다. 네가 '꿈틀거려봤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여러 개인들의 선택과 그 선택에 작용하는 변수들이 집대성된 세상. 조건보다 미지수가 많은 미분방정식. 다들 하나같이 전체를 볼 수 없으니 인물들은 '버나드의 가발'이 사라진 이유 따위에 대해 반복 거론하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면 톰은 이 도박판의 승리자인가? 글쎄.. 그래도 본전은 친 것 같다. 어쨌든 도박 빚은 갚았고, 어쨌든 목숨은 건졌고, 어쨌든 신뢰를 복권했다. 다만 사랑을 잃고, (본인의 선택으로) 조직을 잃었다. 이 사건을 통해 그는 조금 더 이 세상의 섭리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리오를 떠나보내는 그의 마지막 표정은 지금 이 도시를 떠난다고 한들 어차피 세상은 밀러스 크로싱이니 조금 더 똑똑하게 살아야지라는 다짐 정도로 보인다. 그래서 필자는 <밀러스 크로싱>이 톰의 정신적 성장영화로도 보인다.


제3의 개입은 인생이라는 항해에 예상치 못한 암초로 작용하게 되기도 하고 때론 돛에 순풍을 달아주기도 한다. 언급했던 것처럼 <밀러스 크로싱>에서는 이 개입을 예측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수방관이 답은 아닌 것 같다. 필자는 캐스퍼가 죽었다는 사실 보다, 톰이 살았다는 사실에 희망을 갖겠다는 입장이다. 만약 우리가 영화 속 톰처럼 꿈틀거리지 조차 못하고 있다가 무작정 운명에 파도에 떠밀려만 간다면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 반대로 '운'이 달아준 훈장이 마치 자신의 '공' 인양 겸손을 잃고 살게 된다면 포르투나의 손길이 떠나는 순간은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홍상수 감독의 <극장전>의 김동수(김상경)의 마지막 독백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이제 생각을 해야겠다. 정말 생각이 중요한 것 같아. 끝까지 생각하면 뭐든지 고칠 수 있어. 담배도 끊을 수 있어. 생각을 더해야 돼.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 죽지 않게 오래 살수 있도록.'


★★★★★ (별 5개)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 C(hoice), 그리고 F(ort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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