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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Oct 23. 2017

웃기고 앉아'만' 있는 영화

부라더(The Bros, 2017년 作) [브런치 무비패스]


고향 안동에 다다랐을 때쯤 오랜만에 조우하게 되는 의상한 형제, 석봉(마동석)과 주봉(이동휘). 둘은 영화에 의해 차 안이라는 밀폐된 공간에 놓이니 역시나 사고를 유발한다. 이때 필자가 관심 있는 것은 사고 자체가 아니라 그 직전에 인서트 된 부감. 어쩌면 그때 이미 예견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 속에 초현실적인 어떤 것이 동작하리라는 것이. 그러니까 이 부감은 오로라(이하늬)의 시점 쇼트라는 뜻. 필자의 추측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은 스님(허성태)이 등장하기 직전의 석봉과 주봉의 몸을 휘감았던 오한과 한기. 즉, 그 밤의 분위기. 이것은 결코 스님으로부터 유발된 기운이 아니라, 필자가 언급한 '령'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안 사요!'라며 자본주의 사회, 단절된 이웃관계의 사회에 속해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어쩌면 비극을 내포하고 있는 석봉의 유머러스한 대사로 공포의 순간을 상쇄시키는 것을 보니 그 이질적 존재가 공포 유발을 위한 존재는 아닐 것이다. 즉, <부라더>의 귀신 오로라는 밤낮 안 가리고 활보하는 '무해한 귀신'이다.

그러면 왜 그녀는 자신의 세상을 벗어나 현세로 왔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왜 그녀는 석봉과 주봉의 눈에만 보이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대체 가능할 것 같다. 오로라가 석봉과 주봉만의 시야에 포착될 수 있던 것은 필자가 보기엔 세 가지 이유이다. 첫째, 풍비박산 나기 직전의 자신의 두 아들의 관계 회복과 자식들의 아버지에 대한 오해 청산이라는 목적의식. 두 번째, 두 자식들의 입장에서 고인이 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죄송스러움이 통탄의 한이 되어 그들에게만 물화되어 발현된 것. 마지막 이유는 첫 번째 이유와 유사하다. 고되었던 종손집 며느리의 삶을 끝까지 지켜준 님 가시는 길 마중을 위한 이른바 '마실'의 개념. 어떤 이유든 그녀는 <부라더>의 감동을 위해 기능하고, 스토리 완결을 위해 기능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많은 한국 대중영화들이 그렇듯 눈에 빤히 보이는 구조와 설정이다. 작위성 다분하지만 이대로 무탈하게 진행되었다면 필자는 요절복통, 감성팔이, 코믹 휴먼 드라마라는 여러 용어들을 들먹거리며 <부라더>를 가벼운 웃음 자아내는 영화 정도로 넘겨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엔 아차 싶은 순간이 존재한다. 어쩌면 지엽적 딴지일지도 모르겠지만 <부라더>의 균열의 시작은 오로라의 존재가 요단강 너머의 무엇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의 시퀀스부터이다.


'귀신'이라는 단어에 반응하는 오로라의 리액션은 자연현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 집안의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날이다. 그들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도 전날 사건에 대한 언급없이 진행하던 제사의 일과를 묵묵히 이행한다. 이러한 그들의 기괴한 행보는 종손집의 제사의식이라는 것이 귀신의 존재를 묵살시킬 정도로 중요하기 때문은 물론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불가해함은 석봉과 주봉이 자신들이 차로 친 것이 이 세상의 무엇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음에도 그녀가 무엇인지, 왜 나타난 것인지 정상적 사람들이라면 품을만한 의심을 추호도 품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메멘토>의 레나드 쉘비(가이 피어스)처럼 모든 것을 망각한듯한 양태를 보이며 자신들의 자본주의적 목적의식에만 충실한 행보를 진행한다.

결론적으로 <부라더>의 모든 인물들은 자신들 앞에 령이 나타나 그들의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고 한들 오직 이 영화를 끝내기 위해 운동하는 작태를 보이는 것이다. 오롯이 영화 운용적 측면만을 위한 운동성.

'부라더(The Bros, 2017년 作)'



이 지점에서 필자는 코앞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석봉과 주봉에게 질문을 하나 던지고 싶다. '과연 당신들에게 아버지를 원망할 자격이 있습니까?'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어머니의 고됨과 외로움이 마음에 걸렸으면, 출가외인이 되었다 한들 자주 들여다보며 지켜드렸어야지, 집을 떠나 상경한 뒤 코빼기도 한번 안 비추고 자신들의 삶만 아등바등 살아가다가 뒤늦게 돌아와서 당신들이 어머니에게 한 짓 운운하는 꼴은 어리숙하다 못해 폭력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들의 분노가 이해는 가지만 과연 그들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의 문제에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특히 석봉 같은 경우는 신체만 비이상적으로 성장하고 정신은 나이에 비해 현저히 미성숙한 꼴을 보니 사실상 피터팬 증후군적 행태를 보이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혹은 미숙아.


이들이 이렇게 된대에는 영화 외적, 내적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외적 요인. 위에서 언급한 영화의 작위성의 문제. 갈등, 대립구도 따위를 축조하기 위한 낡은 작법들. 재미와 감동이라는 단편적 목적의식만을 위해 영화가 진행되니 캐릭터를 비롯한 여러 면들에서 삐걱거림이 발생한 것이다. 다음은 내적 요인. 종손 운운하는 대가족이라는 극단적 유교방식의 가족제도. 말 그대로 죽은 자를 위해 산자들이 죽어나가는 허례허식들. 이런 극단적 가풍이 결국 자본주의에 충실한 하수인들을 낳은 것이다.

<부라더>의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라는 식의 마인드는 결국 최고의 반전의 등장 시점에서도 그 명맥을 유지한다. 춘배(전무송)는 종손집의 대를 잇는 것의 비극을 어찌나 통감했던지 아들과의 의절을 선택한다. 하지만 자신의 속앓이의 고통을 도저히 못 참겠던지 거의 팔만 대장경급의 목판에 비기처럼 이 집안의 진실을 각인시켜 놓는다. 집안의 거대한 비밀임에도 아이러니하게 아이스크림 하나로 손에 닿을 수 있는 부주의함. 석봉이 집안 물건을 탐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 춘배는 알고 있었으니, 언젠가는 봐주기를 원하는 마음에 의해 은근슬쩍 그곳에 보관했다고 보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이겠다. 어쨌든 관객에겐 작은 비밀이지만 한 집안에는 꽤 큰 비밀일 수도 있는 어머니(성병숙)의 질환이 공개되면서, 우리 모두가 예상했듯이 아버지 또한 결코 원망 받을 분이 아니었다는 가족 회복 드라마로서의 끝을 향해 달려간다.

게다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던 형제는 어느덧 아버지의 제사를 관통하며 '우리 형', '내 동생' 하는 사이가 되는 우애로움을 발산하기 시작하고, 주봉의 회사 대표(오만석)의 월급 상향 보너스라는 한마디 비명에 자본주의의 개들이 그들을 잡기 위해 뛰어드는 클리셰는 차마 눈뜨고 봐주기 참혹하지만 마동석과 이동휘(아니 특히 마동석)의 유머 펌프질로 겨우겨우 <부라더>는 결말을 향해 나아간다. 


이제 필자의 사적인 딴지를 마무리 지어야겠다. 영화의 크레디트에 나오듯 <부라더>는 <용감한 형제들>이라는 연극을 원작으로 한다. 이러한 기원적 측면은 몇몇 맛깔나고 유머스러운 대사에 웃게 되고,  캐릭터들이 분명하며 어찌 되었든 끝까지 끌고 나갈 만한 미세한 구력이 존재하는 이유에 대한 답이 될 것이다. 또한 편집과 설정이 완전히 스토리 진행만을 위해 기능하는(그 와중에 스토리는 얼기설기 구멍이 숭숭 뚫려 있다) 이유에 대한 변명이 되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배우의 연기와 대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꼴이 연극을 영화로 그대로 재현해놓은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뜻이다. 연극으로 보았다면 지금보다 감흥이 나았을까?


<부라더>의 포스터에 쓰여있는 한 문장 '웃기고 앉아있는 중입니다.' 배우는 죽어라 웃기고 감독은 그들에게 모든 걸 맡긴 체 앉아'만' 있으니, 어쩌면 딱 들어맞는 문장.


★★☆ (두 개 반)

(배우는 죽어라) 웃기고 (감독은 그들에게 모든 걸 맡긴 체) 앉아'만' 있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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