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브런치 무비패스]
작년 <너의 이름은.>의 향수를 지우지 못한 것일까? 혹은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로부터 시작되어 <나의 소녀시대로>이어진 대만 발 소녀감성 자극 영화의 파란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약 20년 전 <러브레터>의 역사를 재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필자는 이 질문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배급사 '(주)NEW'에게 던지고 싶어졌다. 더불어 다음 질문도 추가해보겠다. '영화를 배급하기 전 정말로 그 영화를 보십니까?' 물론 예로 언급한 영화들은 질적인 면에 관계없이 그들이 머금고 있는 순수함의 정서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각박한 대한민국의 관객들의 마음을 달래주는데 일조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도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를 한국에 개봉시킨 관계자들은 이 영화 또한 '위무'의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데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위무라기보다는 위무를 가장한 '상술의 영화'이다.
일단 영화로 들어가야겠다. 소녀 사쿠라(하마베 미나미)와 소년 시가(키타무라 타쿠미 - 소년 시가 역)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다. 소녀는 반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외향적 성격의 인물이고, 소년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 침잠의 시간을 갖는 것만이 유일한 낙인 고독한 인물이다. 전자는 삶의 모든 순간은 모두 우리의 의지에 의해 발현된 것이라는 주체성 충만한 인간 중심주의의 사고관을 가진 자이고 , 후자는 운명론자이자 흘러가는 데로 살아가는 자연 순응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췌장에 병이 생겨 시한부를 살아가게 되는 자는 낙관론자인 사쿠라이니 기본적으로 이 영화의 세계관은 '무력감'에 맞닿아 있다.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숙명이며 필연보다는 우연에 가깝다는 세계관. '사쿠라가 어떻게 죽었는가?'라는 지점을 반추해 보는 것이 필자의 의견에 대한 확실한 방증이 될 것이다.
반대가 끌린다는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두 명의 어린 남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인력이 작용하였던 것도 그들의 근본적인 성향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물론 둘 사이의 감정이 호기심인지, 사랑인지, 책임감인지, 동정인지는 영화에서 제대로 포착할 수 없지만, 주변인'이라는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두 명의 '홀든 콜필드'의 감정선을 이해하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지 않겠는가?
일군의 관객들은 영화의 유일한 볼거리라 할 수 있는 조명의 동화 적임, 일본 곳곳의 고즈넉함 그리고 한없이 만발한 벚꽃의 따스함 등의 장치들에 속아 티 없이 맑고 착한 영화라고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지만,무릇 정성일 평론가가 어떤 영화 속에 가장 시각적으로 압도적인 장면이 등장할 때를 항상 조심하라고 말했듯, 필자는 그런 형식들은 우리를 청맹과니로 만들어 현혹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혹시 필자의 의견에 불만을 표하는 독자가 있다면 필자의 세속성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Let Me Eat Your Pancreas, 2017년 作)'
사쿠라는 자신의 비밀을 끝까지 숨기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에는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은 양가적 감정을 가지고 있다. 본질적으로 인간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지르고 싶어 하는 존재이기에 이점은 이해가 간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우연히 만난 그리고 왠지 자신의 비밀을 무덤까지 지켜 줄 것 같은 히키코모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시가에게 접근하기 시작해 자신의 세계 속으로 그를 끌어들이다. 공평한 인력으로 끌어들인다기보다는 자신의 세계 속에서 기능하는 하나의 장치로써 말이다. 아마도 짧은 인생 동안 사랑을 주기보다는 받는 입장에 많이 처해져있었기에, 자신에게 다른 사람의 영역에 쉽게 넘나들 수 있는 권리 같은 것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시가의 입장에서도 딱히 거절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아니 오히려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여학생이, 본인의 자체적 이상형 월드컵 3위에 랭크되어 있던 여인이 자신에게 집적거리는데 두 팔 벌려 반길 일 아니겠는가? 어느 각도에서 바라보아도 과즙 미가 물씬 풍기는 소녀가 자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데이트를 종용하고 심지어 외박을 권유하며 밤새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는데 못 이기는 척 넘어가 줘야지 별수 있겠나? 게다가 그것이 세상을 떠나기 전 절체절명의 마지막 소원이라는 히든카드를 내밀며 자신에게 당위성을 심어주기까지 하니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는 두 가지의 판타지가 저변에 깔려 있는 영화이다. 여성의 입장에서는 초식남을 펫으로 부리는 역차별적 모성애 혹은 권력욕으로써의 판타지. 남성의 입장에서는 스타와의 은밀한 비밀 연애로서의 판타지(그들이 외박하는 호텔에서 거실 바닥에 누워있는 그녀를 카메라가 어떻게 잡고 있는지 반추해보자). 즉, 간단하게 말해 대리만족적 요소가 다분한 영화라는 뜻이다. 그러니 굳이 따지면 이 영화는 착한 영화가 아니다. 아니 순수한 척 가증스러운 미소를 보이고 있으니 이 영화는 '몹쓸 영화'이다.
시종일관 이런 왜곡된 시선으로 응시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그나마 봐줄 만한 미장센들도 결국엔 일본 여행 홍보영상을 위한 수단인가라는 괜한 편견에 휩싸이기도 한다.
사쿠라는 세상에서 사라졌어도 오랜 시간 아니 어쩌면 영원토록 시가(오구리 슌-성인 시가 역)와 그녀의 절친(키타가와 케이코-성인 친구 역)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지점에서는 스타의 판타지가 작동하는데, 시가는 사쿠라의 세계에 예속되어 있던 인물이고 그녀의 절친은 사쿠라를 동경하던 사실상 그녀의 팬을 자청하는 인물이다. 한 명의 스타가 자신의 자장 안에 인물들에게 끝끝내 지배적 위치에 서있게 되는 인간 차별적 논리.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넘쳐나는 시대의 관객들에게 손 내미는 나쁜 판타지. 늘 그렇듯 안 좋은 영화의 감동의 카타르시스는 배우들만이 오열하고 관객들은 무감하기 마련인데 그런 전철마저도 확실하게 밟으며 영화는 결론으로 치닫는다.
이미 눈물을 펑펑 쏟고 있으면서 '어머니 저 좀 울어도 되겠습니까?'라는 모든 사람의 손과 발을 없애는 대사를 왜 뱉어내는지 2달 남짓 남은 2017년 한 해가 저물기 전까지 고민해본다면 답을 찾을 수 있을까?
약 10년 전 <누가 그녀와 잤을까?>라는 영화에 대해 별점 1개 반을 건네며 이동진 평론가는 이렇게 평했다. '그녀가 누구와 자든 말든'. 필자는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에 이동진 평론가의 한줄평에 대한 오마주 격의 한줄평을 건넨다. '췌장을 먹든지 말든지'
★☆ (1개 반)
췌장을 먹든지 말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