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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Oct 30. 2017

확인사살

사망유희(Game Of Death, 1978년 作)


기다리면 이소룡이 제대로 나올 것이라는 강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 영화를 끝까지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그 유명한 <사망유희>의 '층별 보스 궤멸 시퀀스'의 도래 전까지 그의 모습은 감칠맛 나게 등장하며 관객을 농락하기 때문에. 이소룡이 없는 이소룡 영화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이 얼마나 브루스 리의 광신도들을 기만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는 진정 자신의 존재의 가치만으로 한편의 '생산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 영화사의 몇 안되는 남자인가!'라는 경외심마저 들게 만든다(<사망유희>는 작품이라기보다는 생산품이 어울린다).


막 영화 촬영을 마친 빌리 로(이소룡)의 넓고 단단한 등은 바로 다음 쇼트에서 비루한 등판으로 변모한다(필자는 순간 CG 임을 의심했다). 극중극에서 현실로 빠져나가면서 시작되는 이 영화의 도입은 '나는 영화가 아니다'라는 자기 파괴적인 선언으로까지 보인다. 영화의 기본 미덕은 카메라의 존재를 관객에게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사망유희>는 카메라의 존재는 물론이요, 이소룡의 얼굴 사진을 접붙여 그의 대역 김태정 혹은 원표의 얼굴을 가려놓는 괴상망측한 역 쇼트까지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아무리 카메라를 재빠르게 돌린다고 한들 그 이물감 충만한 연결고리를 눈치채지 못할 리 만무하다.


이소룡의 팬들이라면 알다시피 <사망유희>가 체 완성되기 전에 그는 유명을 달리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히 하자면 <사망유희>의 촬영이 잠시 중단된 시점에 완성된 <용쟁호투>를 유작이라고 하는 것이 맞다. 엄밀하게 말해서 그가 타계한지 5년 후에 나온 이 영화는 '인공적인 유작'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사망유희>는 출발부터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못한 영화이다. 아마도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로버트 클루즈 감독 입장에서 가장 손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배우와 스토리였나 보다. 배우는 위에서 언급한 대리자들을 구했고(김태정, 원표), 스토리는 당위성을 부여하는데 급급했다(얼굴을 성형할 수밖에 없는 이유 축조, 대결을 하기 위한 건물로 향하기 위한 이유 축조). 이렇게 무리해가면서 덕지덕지 기워놓은 영화를 만든 이유는 (개인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돈의 논리'의 개입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사망유희(Game Of Death, 1978년 作)'



물론 이소룡 영화에서 몽타주, 미장센 혹은 그 이상의 어떤 것들의 영화적 미학을 찾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서사, 플롯의 세공 등을 기대하는 것 또한 무리한 기대일 것이다.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그의 영화는 이소룡 자체를 보려고 가는 경우가 많다. 이소룡의 영화를 제목으로 말하기보다는 '이소룡 영화'라고 뭉뚱그려 대명사처럼 칭하는 이유도 이런 생태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사망유희> 봤어?보다는 <이소룡 영화> 봤어?라고 묻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유라고 할까?  '1인 극' 혹은 '원맨밴드'의 위엄.

그런데 역설적으로 이런 특수성을 가만할수록 더욱더 <사망유희>는 영화로 성립되기가 힘들다. 우리가 버스터 키튼의 영화에 누군가 버스터 키튼으로 변장하고 나와 그의 행위를 모사한 장면들의 이합집산을 보여주는 것을 과연 영화로 인정해 줄 수 있겠는가?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가 '그리고 아무도 있었다'로 바뀌는 순간이 소설의 마지막에서야 나오는 것처럼, <사망유희>에서의 전환점 또한 거의 마지막에 와서야 겨우 도달한다(언급한 층별 보스 궤멸 시퀀스).


놀라운 순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소룡이 등장하는 순간 우리의 몸을 휘감는 카타르시스는 북받치기까지 하다. 이소룡이라는 사내의 위력을 어렴풋이만 알고 있던 필자에게 그의 '실재'가 더욱 압도적인 감화를 준 것일까? 아니면 영화를 보며 내내 엄습하고 있던 권태가 사라지는 순간의 만족감 때문일까? 마치 첫 스킨십에 온몸이 도파민에 흠뻑 취한 10대 청소년들처럼 이 영화는 우리를(특히 남정네들을) 자극하는 지점이 있다. 쾌락은 잠깐뿐이다. 고양된 감정은 다시 무저갱 속으로 회귀하기 시작한다. 똑같은 발 차기와 주먹질인데 왜 김태정과 원표는 밍밍하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 것일까?

그는 늘 진심이다. 자신에게 상대가 안되는 최약체의 상대를 만날 때에도 언제나 최선을 다한 폭력으로 응수한다. 그것은 그의 표정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이제 그의 랜드마크가 되어버린 그의 표정에 대한 혹자의 묘사. '웃는데 우는 얼굴을 하고 있는 이소룡'. 상대의 낭심을 쥐어뜯을 때에도, 상대를 무참히 밟는 순간에도 그의 표정은 늘 일그러진다. 도전자에게 가장 최고의 예우를 갖추는 것은 최선을 다해 린치를 가하는 것(심지어 적이 대사를 하고 있는 와중에 쌍절곤으로 얼굴을 가격하기에 이른다). 마치 정성일 평론가가 자신과 친분이 깊은 이준익 감독의 영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안 좋은 영화를 통렬히 비판하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김태정과 원표는 표정이 나오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나와야 하는 순간에는 털을 얼굴 전체에 붙이고 있거나, 오토바이 헬멧을 쓰고 있다. 그러니 그들의 행위는 맹목적일 뿐이다. 말하자면 연기 이상도 이하도 아닌 몸짓.

 



혹여나 <사망유희>가 이소룡을 추억하는 혹은 이소룡에게 헌정하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한들 결과론적인 문제는 용인될 수 없다. 진정 순수한 의도였다면 이소룡에게 끌려가는 영화가 아닌 이소룡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영화가 되었어야 했다(최소한 필사의 노력은 했어야 했다). 이 영화는 몇 번 등장하지 않는 이소룡의 처절한 인공호흡으로 힘겹게 목숨을 연명하는 영화가 되고 만다. 본인은 만족할까? 이 생산품을?

'이소룡 영화'라는 말은 이소룡의, 이소룡에 의한, 이소룡을 위한 영화가 된다는 뜻이다. 즉 영화의 대부분의 공이 그에게 돌아갈 공산이 크다. 그런데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본다면 영화의 '과오' 또한 그의 '탓'으로 점철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사망유희>의 패착의 원인을 그에게서 찾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의 동의 없이 그를 이용만 한 이 영화는 결국 이소룡 본인에게 다시 총구를 겨눈 셈이 된다. 말하자면 '확인사살'. 단 한가지 쾌거가 있다면 이소룡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란 츄리닝의 탄생 설화에 대한 내용을 알게 해준 것뿐.


★★★ (별 3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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