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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Nov 20. 2017

죽음에 대한 3가지 반응

러브레터(Love Letter, 1995년 作)


그리움

영화의 시작. 설원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히로코(나카야마 미호). 참던 숨을 내뱉고 일어나 코트 위에 눈을 털어낸다. 필자는 마치 이것이 그녀에게 드리워진 '죽음'을 털어내려는 몸짓으로 보인다. 이 비약을 설명하기 위한 통념 비틀기. 일반적으로 죽음은 흑(黑), 삶은 백(白)으로 상징된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정확히 말하자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 이 사실을 오롯이 받아들인다고 가정한다면 삶이 흑이고 죽음은 백으로 묘사되어야 마땅치 않은가. 마치 장례를 치를 때 상복은 흑색이고, 사자(死者)가 입는 수의는 곱디 고은 백색이듯이. 이어지는 롱 쇼트. 그녀가 일어나 내려가는 고베의 산등성이에 가득 찬 눈. 히로코의 세계에 드리워진 죽음에 대한 메타포.


생(生)과 사(死)는 습자지 한 장 차이라는 것이 문득 크게 와닿는 순간은 다음 두 가지의 경우일 것이다. 자신이 생을 마감하기 일보 직전이거나, 가까운 주변인이 죽음으로 세상에서 사라졌거나. 히로코가 처한 상황은 후자. 그녀는 자신의 정인이었던 이츠키(카시와바라 타카시)와 사별했다. 오늘 그의 2주기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죽음을 상징하는 눈발은 장례식장에 서있는 그녀를 향해 흩날리고 다시 코트에는 싸라기눈이 쌓여간다. 죽음을 그렇게 쉽게 털어낼 수 없다는 듯이. 다행스럽게도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자신의 아들 장례식이 마을 잔치라도 되는 양 술판을 벌이려는 이츠키의 아버지 같은 이도 있고, 누이의 남편의 사인이 폐렴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츠키(나카야마 미호 - 성인의 이츠키 역만 기입한다)의 삼촌 같은 이도 있다. 친족조차 잊어가는 일을 왜 히로코는 잊지 못할까? 그녀는 왜 망각의 늪에 잠식되지 못하는가?


'일단은'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히로코를 엄습하는 죽음의 그림자의 정체는 떠난 이에 대한 '그리움'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일단은'에 대한 이야기는 후술 한다). 즉, 자신의 정인을 마음속에서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에게 프러포즈하는 선배 아키바(토요카와 에츠시)에게 확답을 주지 못하고, 자신의 감정의 여운이 승화된 물체라 할 수 있는 '편지'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츠키의 옛 주소로 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러브레터>의 이야기는 명료해진다. 사별한 정인을 회귀하는 '반추 로드무비' 혹은 사별한 정인을 잊기 위한 '망각의 로드무비'. 결국 죽음으로 비롯된 자신의 상흔을 위무할 수 있는 방법은 본인 스스로 떨쳐내는 '용기' 혹은 죽은 자가 되돌아오는 '기적'뿐이다. 그렇다면 히로코의 입장에서 자신의 정인과 동명이면서 모습은 자신과 같은 '이츠키의 존재'는 위무자의 역할로써 탁월하다. '나'이기도 하면서 '그'이기도 한 혹은 제3의 존재이기도 한 '그녀'. 이 다의적 존재에게 '괜찮다'라는 대답을 받아낸다면 응어리는 씻은 듯이 녹아내릴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 이츠키(女)는 히로코와 공존하는 인물인가? 필자는 아니라는 무리한 주장을 하겠다. 이츠키(女)는 히로코의 마음속 우주의 존재하는 인물이며, 상황 타개를 위하여 히로코가 창조한 이공간 속(혹은 내면 속) 도플갱어일 것이다.

이츠키(男) 어머니(한 분샤쿠)의 대사. '그들이 어릴 때 살던 오타루의 동네가 국도로 만들어져 없어진 공간이 되었다.' 미묘한 균열은 시작되었는데 영화는 모른 척 그 부존재의 공간으로 히로코를 데려다 놓는다. 무엇보다도 히로코와 이츠키 그들은 스칠 뿐 끝내 만나지 못하지 않았던가. 두 손 부여잡고 울며불며 죽은 이츠키(男)에 대한 감정을 공유하지 못하지 않았던가. '영화가' 그들을 왜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을까? 답은 뻔하다. 내가 사는 우주와 내 마음속 우주가 충돌하니까. 둘은 영원한 평행선이어야만 하니까.


그렇다면 이츠키(男)과 이츠키(女)의 학창시절의 러브스토리는 무엇인가? 이 아름다운 스토리는 잔인하게도 히로코에게 죽음을 털어내도 된다는 면죄부로 돌아온다. 자신의 정인이 자신을 사랑했던 이유가 첫사랑과 닮아서였다는 빈정 상하는 팩트. 히로코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정체 모를 픽션은 아닐까? 또 다른 사랑을 찾아떠나도 된다는 명분을 주기 위한 그릇된 결과물은 아니었을까?

영화의 끝자락. 이츠키(女)가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는 순간의 교차편집.

히로코 왈 '잘 지내시죠?' 이츠키 왈 '저는 잘 지냅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서로 다른 이에게 하는 문답이지만 교차편집이라는 기법은 마치 둘이 대화하는 것처럼 변이 시킨다. 이로써 히로코는 구원받는다. 자신으로부터(이츠키(女)), 정인으로부터((이츠키 男).


'러브레터(Love Letter, 1995년 作)'



두려움

위의 논지에서 한 가지 드는 의문. '두 명의 이츠키의 스토리가 히로코가 축조한 거짓된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필자의 의견은 어불성설이 되고 히로코의 극복은 실패로 결론지어지게 된다.

다른 관점으로 보기 위해서 건들 수 있는 것은 한 가지이다. 주체의 전이. 히로코의 이야기가 아닌 이츠키(女)의 이야기로 보는 시각의 전환. 이츠키의 첫 등장. 자신의 침대에 심한 독감으로 누워있는 모습. 그녀는 가족력을 가지고 있는 환자이다(아버지가 독감으로 비롯된 폐렴으로 사망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오타루에도 고베와 마찬가지로 눈(죽음)의 그림자는 가득 채워져 있다. 아마도 이츠키를 엄습하고 있는 죽음의 그림자의 정체는 '두려움'일 것이다. 본인 사망에 대한 무저갱의 두려움. 그녀에게도 히로코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그림자를 청산해줄 존재는 결국엔 본인뿐이다. 그래서 창조해낸 내적 존재 히로코. 두려움의 정체 파악을 위해 내적 우주를 탐험하는 자아의 로드무비.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트라우마에 대한 극복이자 자신의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의 로드무비.

이 논리로 본다면 영화의 처음은 새로이 보인다. 히로코의 개안(開眼)은 이츠키의 몽중(夢中)(히로코의 스토리를 이츠키의 꿈이라고 대표하겠다). 즉, 히로코가 깨어나는 순간은 이츠키의 꿈이 시작되는 순간이자 내적 자아가 길을 떠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거론해야 하는 오타루. 이츠키(男)의 집은 국도의 터널로 변해있다. 이 터널의 입구에 우두커니 서있는 히로코. 터널 밖과 안은 눈밭과 어두운 콘크리트 바닥으로 명확한 명암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필자가 서두에 언급한 흑=생(生), 백=사(死)라는 가정법을 여기에 다시 대입시킨다면 히로코가 향하는 터널의 어둠은 삶의 길이다. 꿈속에서 현실의 두려움을 건드리기 위한 마지못한 발돋움. 어쩌면 자각몽으로의 한 걸음.


이츠키(女)의 대체자로써 히로코가 반추하는 과거 속 이츠키(男)는 분명히 이물감이 드는 존재이다. 그런데 이것은 중요하지 않다(그가 과거의 실존 인물이든, 꿈속에서 창조된 인물이든). 말하자면 그의 존재는 자신의 꿈속 세상의 일종의 맥거핀 같은 것이다. 그녀가 끝내 건드리기 싫었던 것(혹은 두려웠던 것)을 스스로 열지 못하게 하려는 미궁 축조를 위한 존재. 이츠키(女)가 두려워 한 판도라의 상자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다. 모른 척 넘어가고 싶었던 감수성 예민한 소녀 시절에 죽음이 남긴 깊은 상처,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트라우마. 두려움을 상쇄하기 위해 필요한 극단적으로 순수한 사랑의 감정. 그것이 이츠키(男)의 존재의 이유이다. 망각한 줄 알았다. 이제는 극복한 줄 알았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힘으로 기억을 걷는 것은 무리이다. 그래서 이츠키(女)에게는 히로코라는 존재가 필요하게 된 것이리라.


다시 영화의 끝자락.

이츠키 왈: '잘 지내시죠?', 히로코 왈: '저는 잘 지냅니다.'


사경에서 깨어난 순간 이츠키가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구원을 받는 순간이다.




죄책감

필자가 논한 두 가지 접근법 중에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심지어 두 가지다 그르다 해도 수용할만한 주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이츠키가 조금 더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어울리게 보인다. <러브레터>의 마지막 쇼트는 누구를 위한 카메라였는지를 떠올려 봤을 때 그렇다.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존재라는 뜻은 결국 이 이야기가 누구를 위한 이야기였는지에 대한 감독의 변이 될 것이다. 각설하고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이다. 이것이 히로코의 이야기이든, 이츠키의 이야기이든 혹은 공존하는 두 여인 각자 이야기의 접점이든, 두 사람이 분명히 공유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공통분모는 '죄책감'이다.


망자를 먼저 떠나보낸 데에서 온 남아 있는 자들의 맹목적인 죄의식. 한 명은 사랑하는 연인을 떠나보냈고, 다른 한 명은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그리움이든 두려움이든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의식은 결국에는 죄책감이라는 외피를 둘러싸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에게 보내는 '러브레터'는 '제발 날 좀 구원해 달라는' SOS 메시지이다. 

'러브레터'라는 낭만적인 단어를 차용하면 죽음과의 직면에서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을까?, 환상의 존재를 소환하여 대신 가시밭길을 걷게 만들면 조금 더 쉽게 떨쳐 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 것인가? 그 정도 했으면 충분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숙명(宿命) 이자, 난제(難題)이기에.


★★★☆ (별 3개 반)

죽음에 대한 3가지 반응(그리움, 두려움 그리고 죄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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