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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Nov 25. 2017

굴복당한 인본

김광석(Suicide Made, 2017년 作)


제목은 <김광석>이다. 감독은 전작 <다이빙벨>을 연출한 고발뉴스의 이상호 기자이다. 그렇다면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음악영화인가 고발 영화인가? 정체성의 혼란. 이 영화의 기획 단계에서 감독 본인의 입으로 '기본적으로 음악영화로 가는 거야'라고 했으니 일단은 음악영화로 보겠다(영화 속에 존재하는 장면이다). 그렇다면 첫 번째 의문점은 무수히 많은 김광석의 명곡들 중 영화에서 우리가 들을 수 있었던 곡은 예닐곱 곡에 불과했다는 것. 이어지는 두 번째 의문점. 만약 진정한 음악영화로 만들려고 했다면 <원스>처럼, <인사이드 르윈>처럼 혹은 무수히 많이 거론할 수 있는 여타의 음악영화들처럼 영화의 첫 시작과 끝을 음악으로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그것이 김광석 음악의 쓸쓸함을 내포하고 있었으면 더할 나위 없었을 것이고. 아무리 본업이 기자여도 그 정도 영화적 기본은 알 텐데.

영화 <김광석>은 처음부터 묵직한 분위기를 잡으려는 듯 김광석이 사망한 1996년 1월 6일의 뉴스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김광석의 부인 서해순의 인터뷰가 등장한다. 잠시 구조 파악을 위해 영화의 마지막으로 점프한다. 김광석의 아버지와 저작권료 관련된 분쟁으로 앙앙거리는 서해순의 목소리. 지저분한 가족 싸움. 즉, 구조적으로 <김광석>은 서해순으로 시작해서 서해순으로 끝나는 영화이다. 수미쌍관 구조. 즉, 강조의 구조. 그렇다면 이 영화는 음악 외적인 곳에 방점을 찍고 있으니 음악영화로써는 '우선' 실패다. 심지어 김광석 작사, 작곡의 곡은 저작권료가 서해순의 지갑으로 들어간다는 이유로 영화의 OST로 차용조차 하지 않았다(이 내용은 크레디트에 명기된다). 음악영화 축조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만들 생각조차 없었다는 확신.

이제 필자는 <김광석>을 고발 영화로 보겠다. 그렇다면 서두에 언급한 이상호 기자의 '음악영화' 운운하는 기획의도의 인서트는 맥거핀이다. 강조와 맥거핀을 통한 임상학적 추론의 결과 <김광석>은 서해순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인가를 파고드는 '고발의 로드무비'다. 만약 이 영화에서 답을 찾기를 원하는 관객이 있었다면 실망할 것이다. 심증만이 둥실둥실 떠다닐 뿐 오히려 답답함만 깊어질 공산이 크다. 진실을 밝혀 오랜 숙원사업을 해소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진실을 수면 위로 견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 사회적으로 공론화시켜 결론적으로는 '김광석의 죽음에 관한 재수사'를 촉구하려는 영화. 그것이 정의사회 구현이라 믿는 영화.


'김광석(Suicide Made, 2017년 作)'



의도가 바람직하다고 무조건적인 칭찬을 선사할 수는 없다. 비평적 시각 없이 <김광석>을 받아들이면 맹목적인 격노에 휩싸여 청맹과니가 될 공산이 크다. 이 영화를 바르게 수용하려면 두 가지 윤리가 충족되어야 한다. '기자의 윤리', '관객의 윤리'. 영화에 사용된 과거 <피플 INSIDE>에 출연한 이상호 기자의 말. '99%의 확신이 있지만, 1%의 불가지론적 가능성의 존재가 있으면 기자는 행동하면 안 된다(그의 대사를 필자가 각색했다).' 그가 전시해 놓는 99% 가능성들. 사건 정황의 모호함(당시 관계자들 증언의 불일치), 관계자 조사에 대한 허술함, 서해순의 음성을 거짓이라 판별한 거짓말 탐지기, 서해순이 유아 살해범이고 이혼 경력을 숨기고 김광석과 결혼한 팩트, 무엇보다 어쨌든 지금 김광석의 죽음의 최대 수혜자는 '서해순'이라는 문제 등.

1%의 반대 입장의 가능성 검증. 김광석의 살아생전의 일기장을 자살, 우울증 전문 심리학자에게 보여준 후의 의견을 듣는 것이 유일하다. 그녀의 소견. '이런 심리상태였으면 자살했겠는데요.' 왜 이상호 감독은 99%의 가능성을 조사하는 데에는 다각도의 관점에서 접근을 하면서, 1%의 가능성은 허술하게 검토하는가의 문제. 즉, <김광석>은 이미 확진을 내린 상태에서 고발을 취하고 있다. 물론 그가 공들여 모은 자료가 사무실 침수로 유실되고, 김광석의 부검 결과에 대한 접근이 불가하기도 하니(서해순이 본인 이외의 접근을 법적으로 차단시켜놓았다), 진정 악전고투였을 것이다. 필자가 원하는 것은 단지 반대편의 입장(김광석은 살해되었다)에서와 마찬가지의 평등적 고찰이었다.


단편적인 예를 들어보겠다. 만약 서해순이 '살해범'이 아니라 '단순한 비도덕적 인간'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최악'이 아닌' 차악'이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니까 '김광석은 자살이 맞는 상황에서 자살 후 그의 재산을 모두 득(得) 하기 위해 재빠르게 움직인 가증스러운 인간 정도'인 것이 팩트가 된다면 재수사는 의미가 없어진다. 또한 그녀는 돈의 노예라는 비난이 아닌 살해범이라는 누명을 쓰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게 될지도 모른다. 즉, 그녀가 받을 죗값의 크기가 달라지고, 그녀가 받을 비난의 깊이가 달라지게 될 우려가 있다는 뜻이다. <김광석>은 확실한 발포는 하고 있지 않지만 '서해순이 김광석을 살해했다 혹은 살해 공모를 했다'라는 문장을 '이미' 팩트로 여기고 있어 보인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Suicide Made>이다. 직역하면 '축조된 자살.'


필자는 '기자의 윤리'가 어긋나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럴 위치에 있지도 않고, 윤리에 어긋났다고 확신하지도 못한다. 무엇보다 기자도 인간이기에 그들의 기사는 아무리 객관적으로 작성하려 해도 주관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관객의 윤리(혹은 독자의 윤리). 각자 나름의 객관적, 광의적 시각에서의 필터링을 선행해야 한다. 확신을 하기 전 필요한 역지사지의 태도.

여기까지가 <김광석>이 취하는 태도와 <김광석>을 보면서 느낀 관객의 태도에 대한 필자의 알량하고 얄팍한 지적질이다. 이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는 관객 각자의 몫이다.




마지막으로 영화 <김광석>이 안겨주는 (개인적인) 비감. 김광석의 음악 중 필자의 베스트 몇 곡을 다시 살펴보았다. <사랑이라는 이유로>, <말하지 못한 내 사랑>, <기다려줘>, <거리에서> 등. 다행히 김광석 작사/작곡은 없었다. 음악은 예술 중에서도 가장 최상위층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무작정 음미하고 탐닉해야 할 음악이라는 예술을 접하는 데에 자본주의적, 사회도덕적인 요소들이 얽혀있는 중상모략 때문에 잠시 주춤해야 한다는 지리멸렬한 사실. 내가 듣는 곡의 저작권료가 서해순의 몫이 될 것이라는 사실로부터 시작되는 분노. 이것이 필자가 느낀 첫 번째 비극이다. 같은 맥락에서 '김광석은 자살이 아닌 타살이다'라는 확증이 없는 상태에서도 서해순을 저격하게 되는 나와 우리의 심리. '어떻게 사람이 살인 공모를 할 수가 있어?' 가 아닌 '재산 갈취를 위해 그랬을 것이다'라고 확신해버리는 사태. 이것이 내가 느낀 두 번째 비극이다.


언젠가 '10억을 주면 감옥행도 무릅쓰겠다'라는 설문에 YES를 선택한 10대 청소년들(고등학생 44%, 중학생 28%, 초등학생 12%)이 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정말로 인본이 자본에게 굴복한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인가? 혹은 그런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인가? '서해순이 돈 때문에 김광석을 살해했다'라는 문장이 자연스럽게 팩트라 여기지고 당연하게 필자의 비평적 시각을 가리는 뻔뻔함이 무섭다.


★★★ (별 3개)

자본에 굴복당한 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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