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피로연(The Wedding Banquet, 1993년 作)>
'결혼 피로연'이 치러지는 순간은 일종의 공명의 순간이다. 서로 다른 충돌들이 일으키는 배음 효과. 혹은 여러 층위의 균열로부터 야기된 기괴한 결과물. 모두가 왁자지껄 대고 있지만 정작 누구를 위한 피로연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형식적인 행사. 공허한 이벤트. 이 마지막 순간을 관망적 자세로 바라보던 우리는 아니 최소한 필자는 정체 모를 피로감에 짓눌리게 된다. 모든 인류는 아프리카인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학설이 있지만 혹은 지구촌이라는 이름으로 전 인류를 운명공동체처럼 묶기도 하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국적(환경), 성별, 나이(세대) 등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 분류된다. 그로 인해 차이와 차별이 시작되고 심하게는 계급 형성과 탄압이 도래하기도 한다. 세상은 이러한 배척 현상을 포용할 수 있는 그럴듯한 답변으로 '틀린 게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자'라고 말하곤 하는데 내가 보기에 <결혼 피로연>은 그 문장의 오류를 증명하는 영화이다.
근본적인 문제의 시발점은 생물학적 측면에 있다. 남성과 여성은 XY, XX 염색체라는 유전적 차이를 가지고 있는 종이다. 말하자면 Y의 유무로 성별이 구분된다는 뜻. 웨이 퉁(조문선)은 남성을 사랑하는 남성이니 아이를 잉태할 수 없다. 즉, 자연을 역행하는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내이다. Y 염색체가 유실되었거나 Y의 유전적 특징이 자연스럽지 않은 불완전한 남성. 그의 어머니(Gua Aleh)는 "어렸을 때 여자한테 받은 상처 때문일 거야"라며 환경적 원인으로 탓을 돌리며 외면하려 하지만 영화는 선천적인 원인 때문이라고 명확히 피력한다. 그와 그녀에 대한 명명(命名). Y가 유실된 남성은 웨이(X), 오롯한 여성은 웨이웨이(XX). 그들의 유전적 특질을 이름으로 못 박았으니 그들은 결코 낭만적 사랑으로 이루어 질리 만무하다(그런 이유에서 였을까? 피로연장에서 기다란 닭 머리에 두 남녀가 입을 갖다 대는 장면은 '개인적으로' 기묘하면서 불편한 성적 상징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사태 발생의 두 가지 기폭제에 대한 추가 고찰. 우선 미국에서 웨이웨이(메이 친)가 속한 '추방당하기 직전의' 이민자라는 위치. 그녀의 삶에 맞닿아 있는 인종 혹은 국가적 차이가 사기결혼 형성에 일조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것보다 더욱 확실한 방점은 웨이와 그의 부모님들과의 세대 차이에서 비롯된다. 보수주의적, 가부장적 웨이의 부모님. 그들은 당신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 아들의 결혼과 손주를 보는 것이 절체절명의 소명인 듯 행동한다. 여기까지는 '종족 번식의 본능' 혹은 '혈육의 정'이라는 측면으로 넘어가 줄 수 있겠지만은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기필코 자신들의 '격'에 맞는 결혼 피로연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이다. 형식적으로라도 결혼사진을 남겨야 한다는 우격다짐. 웨이와 웨이웨이의 강제 합방에 일으킨 지배적 원흉.
이상 3가지가 이 피로연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당위적 요소들이다. 이제 한발 더 나가 그들의 최악의 하루를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겠다.
'결혼 피로연(The Wedding Banquet, 1993년 作)'
결국 그들의 결혼 피로연을 이뤄준 사람은 누구인가의 문제. 과거에 웨이의 부모님을 모셨던 첸서방. 갑작스럽게 등장하여 성대한 잔치를 무일푼으로 대접하겠다는 제안에 가오(Gao)가문의 가족들은 일말의 고민을 하지 않는다(웨이만이 미약한 거절 의사를 내비칠 뿐). 말하자면 이 가족은 갑이라는 위치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대접받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기득권이다. 이들은 애초부터 그랬다. 웨이는 공중전화 앞에서 음악을 하고 있는 거리의 음악가에게 돈을 쥐여주며 잠시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고, 웨이의 부모들은 사이먼(미첼 릭텐스타인)의 집에 얹혀살고 있으면서도 마치 당신들이 이 집의 주인인양 자신들의 집사의 요리와 비교 운운하는 무례한 발언을 일삼기도 한다. 끝내는 이 순진한 미국인에게 가오 집안의 아이를 일정 부분 부양하게 되는 책임을 지우며 사이먼을 이 집안의 '미국 집사'로 전락 시켜 놓는다. 이런 행동 양상은 또 다른 타자 웨이웨이에게도 마찬가지. 모성애 혹은 가족 구성의 본능을 자극하여 그녀가 아이를 낳게 만드는 결정에 영향을 주는 웨이의 어머니의 행동 또한 필자의 눈에는 대단히 폭력적으로 보인다. 즉, <결혼 피로연>의 심연의 층위에는 계급 차별적 요소들까지 산재한 진정한 아수라의 장이 펼쳐져 있는 셈이다.
이상 필자는 몇 가지 측면의 인간 군상에 존재하는 차이를 들여다보았다. 여기에는 틀린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만 있을 뿐. 그렇다면 '다름'을 인정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인가? 과연 그렇게 볼 수 있는 것일까?
모든 내막이 드러난 뒤 그들은 순응하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화해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위무해 주는 것은 거짓으로 점철된 그날의 분위기뿐이다. 공항에서 펼쳐보는 결혼사진첩. 문득 떠오르는'피카소의 일화.' 피카소에게 현대예술이 실재를 왜곡하고 있다며 자신의 아내의 사진을 보여주고 이것이 바로 실재라고 말했던 기차 옆자리의 신사. 그 사진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 후 피카소의 일갈. '당신 부인은 끔찍하게 작군요, 게다가 납작하고요.' 논조는 이렇다. 아무리 현실 그대로를 현상화한 결과물일지언정 '사진'은 결코 실재가 될 수 없다. 심지어 이들의 경우처럼 피사체에 왜곡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을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실체 없는 것을 들여다보며 얻어내는 낡은 위안. 이들의 '인정' 혹은 '화해'는 완벽한 실패다.
결과론적 관점에서 상황을 명료화해보겠다.
1. 웨이는 사랑을 쟁취했고 현재의 성 정체성으로는 불가능했던 아이까지 얻었다.
2. 웨이의 부모는 아들의 결혼을 일궈냈고 가오 가문의 대를 이었으나, 불편한 진실로 인해 평생의 상처를 떠안았다.
3. 사이먼은 사랑을 쟁취했지만 가오 가문의 집사의 형태로 남게 된다.
4. 웨이웨이는 미국에서 살수 있는 생존권을 얻었지만 한 집안의 대리모가 되어야 하는 지독히 가혹한 선택을 하게 된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가없다.
필자의 사견으로 위의 인물들 중 가장 큰 수혜자는 웨이이고, 가장 큰 피해자는 웨이웨이다(마지막 공항에서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웨이뿐이다). 모두가 불편한 구조 속에서 마저 최악의 상황은 여성이 직면하게 되는 영화의 시선. 여성을 도구화한다기보다는 여성을 도구화하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는 이안 감독의 시선.
감독은 잡다한 비틀림의 요소들을 가족이라는 형태의 시스템 속에 가둬놓고 어떤 메커니즘으로 움직이는지 그저 손 놓고 지켜볼 뿐이다. 그것으로 그는 증명 해낸다. 다름을 인정해도 나아지는 것은 별로 없다는 것을. 실험자, 피실험자 그리고 관찰자 모두가 황망해지는 지금 이 순간.
★★★★☆(별 4개 반)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는 논리에 대한 반증 혹은 예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