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MEMOIR OF A MURDERER, 2017년 作)
김영하의 원작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한번 읽기 시작하면 쉽사리 손에서 내려놓기 힘든 작품일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이 책의 스토리를 전혀 모르는 필자와 같은 관객이라면 중반의 어느 지점까지는 영화에 질질 끌려다니는 체험을 하게 될 공산이 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이야기'에 대한 현혹. 우선 두 가지 측면에서 김영하의 세계가 흥미로운 면모가 있다. (좀 오래된 시류이지만) 소설이든 영화든 더 이상 선과 악의 대결 구도는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지 못한다. 현시대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최악과 차악의 대결(예를 들어 연상호 감독의 영화 <사이비>) 혹은 최악과 비루한 소시민의 대결(예를 들어 정유정 작가의 소설 <7년의 밤>). 아마도 이것은 우리네 세상은 이분법적 사고관으로 작동하는 곳이 아니라는 현실 지각 때문이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너무 많이 보아 와서 다소 진부한 감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김영하의 이야기가 취하고 있는 전(前) 세대의 연쇄살인범과 현(現) 세대의 연쇄살인범의 조우라는 설정은 꽤나 신선하다.
위의 측면이 보편적 우수성이었다면 두 번째 측면은 이야기에 독창성을 부여하는 요소일 텐데, '알츠하이머'라는 현대의학이 정복하지 못한 철옹성을 소재로 차용했다는 점이다. 특히 치매에 걸린 당사자 김병수(설경구)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되는 설정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정보량의 미비함에 대한 당위성을 제공하게 되고, 심지어 그 정보를 전부 믿을 수도 없는 상황을 축조하기에 이른다. 즉, 추리의 묘미를 제공하면서, 모든 것이 김병수의 착각일 수도 있다는 반전의 함정을 흩뿌리기까지 가능하다. 일거양득의 효과.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보는 이로(혹은 읽는 이로) 하여금 수많은 경우의 수들이 머릿속에 헤집고 다니게 하는 효과를 창출 해낼 것이고, 당장 답을 알고 싶은 끓어오르는 충동에 빠지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셋 중에 하나다. 책을 끝까지 읽거나, 영화를 끝까지 보거나. 아니면 결말을 체험하는 것을 포기하거나. 이야기의 힘이 주는 불가항력적 마약.
그런 연유로 필자도 취할뻔했다. 이야기에 중독되어 시야가 흐릿해질뻔했다. 다행스럽게도(영화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중반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 영화의 지구력은 현저하게 떨어지기 시작하게 되고 우리는 자세를 고쳐잡고 관망적 자세로 영화를 관찰할 수 있게 된다. 너무 잘 쓴 소설을 영화화하다 보니 생긴 부작용 정도라고 변호해 주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면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같은 영화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말하자면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작 소설을 그대로 재현해 놓는 데에 급급할 뿐이다. 문학의 언어적 풍부함, 탁월한 묘사력을 따라가는 비책으로 선택한 방법이 김병수의 '낭독 펌프질'인데, 약 2시간 남짓한 영화를 내레이션만으로 끌고 나아가는 것은 당연히 무리수이기 마련이다. 예견된 실패.
여기서 해보고 싶은 질문. 그렇다면 영화는 문학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일단은 가능하다(물론 영화는 어떤 면에서 문학이라는 예술에 대해 본질적인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이런 중대한 담론은 다른 자리에서 하도록 하겠다). 비견 직전의 문단에서 예로 들은 코엔 형제의 영화도 있지만, 근작 중에서 찾아본다면 박찬욱의 <아가씨> 같은 영화. <아가씨>가 원작 소설 <핑거스미스>보다 훌륭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지만 분명히 솜씨 좋게 변주하여 감독 자신의 스타일로 체화했다는 점은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아가씨>가 개봉했을 때, 원작 소설과의 일치율, 우열의 관계 등에 대해 심도 있게 거론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단지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는 영화의 탄생 기원 정도만 알고 지나갔을 뿐 자연스럽게 두 예술을 전혀 독립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살인자의 기억법>은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 감독의 세계관을 뜻하는 단어를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무념(無念)'이다. 아무리 찾으려 해도 감독의 그림자는 찾을 수가 없다. 그러기에 느닷없는 유머는 그 자체로 웃음 짓게 만들기는 하지만 도무지 영화와 접합이 안된다. 비교할 만한 예, 이마무라 쇼헤이의 <복수는 나의 것>. 더욱더 지독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유머는 영화와 절묘하게 잘 어울린다.
어느 순간 감독 본인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시하기만 하는 것이 민망했는지 뒤늦게 기묘한 마무리를 지어놓는다. 요양원에 입원한 병수를 찾아온 딸 은희(설현). 그녀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병수의 머리만 다듬는다. 그다음(혹은 다음다음) 쇼트, 마치 민태주(김남길)가 살아있다는 듯한 병수의 내레이션이 등장하며 영화의 첫 장면과 같은 서슬 퍼런 설원 위 기찻길로 공간을 재 이동시킨다. 이것은 이야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키겠다는 명백한 의도일 것이다. 속아주는 셈 치고 이 맥을 따라 가정해보면 벙어리 코스프레하는 은희의 모습은 병수의 환상이 될 것고, 여기에 검사(김민재)가 병실에 찾아오는 불필요한 인서트까지 침입하면서 마치 모든 것은 병수의 '자각몽'이었다는 또 다른 결말을 만들어 그것을 담론화하려는 의도로 읽히기에 이른다. 너무 늦었다. 정 다시 한번 사건을 곱씹어 보고 싶은 관객이 있다면 차라리 원작 소설을 읽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것이 필자의 입장이다.
단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병수와 태주가 악귀가 된 이유이다. 세습된 폭력. 특히 병수의 아버지가 군인이라는 점은 더욱더 시대적 맥락의 환유로 읽히게 된다. 군사독재체제, 권위주의적 가치관. 까라면 까야지 해결된다고 착각했던 그 시절의 비정. 어긋난 권력욕 혹은 정복욕. 폐단은 여전히 궤멸되지 않았다. 김병수로부터 약 20년이 지난 후의 민태주로 이어지는 폭력의 역사를 보건대 말이다.
마지막으로 두 가지 이물감. 첫째 카메라의 태도. 물론 이것은 필자의 더러운 선입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도무지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진 여성을 왜 카메라는 앙각으로 훑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정확히 기억나는 쇼트는 누워있는 은희를 하반신에서 상반신으로 카메라가 이동하는 무빙이므로 앙각이라는 단어는 오류라 판단해도 무방하다). 시종일관 자신의 아버지와 단둘이 지내는 여인을 아래에서 위로 훑어 볼만한 시점의 주체가 누구이길래? 두 번째 지독히 의문스러운 점. 왜 한국 경찰은 항상 사건 현장에 뒤늦게 도착해서 수습하는 역할만 하는 것일까?
★★★ (별 3개)
차라리 원작 소설을 볼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