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당한 사람들(The Beguiled, 2017년 作)
참 이상한 것이 그것이 자신을 헤칠지도 모르는 야수일지언정(심지어 적일지언정) 상처받은 영혼에게는 자연스레 동정의 한 표를 던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아이러니한 속성이다. 그것이 동정인지, 약자에 대한 묘한 우월감 같은 것인지 혹은 (주체가 여성이라고 가정한다면) 모성애의 본능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것도 아니면 스톡홀름 증후군일까? 심지어 (여성의 입장에서) 나의 손길을 원하는 자가 매력적이고 정력적인 남성이라면 감정은 더할 나위 없이 증폭될 공산이 크다. 동정과 사랑 사이의 어디쯤. 그런 관점에서 영화의 제목에 수동태적 표현인 매혹'당한' 사람들은 1차적으로 그녀들이다. 이(異) 공간에 살고 있는 천사들 혹은 마녀들.
'이공간'이라고 표현한 이유. 넓이와 깊이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몽환의 숲 속에서 시작된 영화는 왠지 더 깊어 보이는 위치에 있는 그녀들의 피난처로 존(콜린 파렐)을 끌고 들어간다. 흡사 아테네의 어느 신전을 가져다 놓은 곳 같은 그녀들의 사적 공간. 영화에는 이 건물의 전경이 꽤나 많이 카메라에 담기는데 점점 초월적인 공간 혹은 마녀 굴로 변이 되며 우리들의 마음속에 침입한다. 전시(戰時)가 아니었을 때 과연 이곳으로 누가 찾아올수나 있었겠나 싶을 정도로 도무지 좌표를 알 수 없는 공간. 조금 더 비약적 표현으로 '숲'은 사후세계와 현세의 접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멀찍이 전쟁의 여파로 보이는 연기만 보일뿐 남북전쟁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나는 믿을 수가 없다. 아니 단지 여성들만 있는 공간이라는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설정 정도로 치부하기로 했다. 그렇다면 존은 잠시 현세로 건너온 망자인가 아니면 요단강을 건너온 생자(生者) 인가.
필자의 소견은 존은 실수로 망자들의 은밀한 성역에 발을 들인 자(者)라는 입장. 그렇다면 이 저택은 망령들의 공간. 의견에 대한 부연. 많은 경우 현세의 것이 아닌 존재와 마주치면 대게 비극적 결말에 도달하곤 했듯이(예를 들어 <천녀유혼> 혹은 <곡성>) 그녀들에 의해 사지를 들린 채로 들어간 존은 나올 때는 시체가 되어(누가 봐도 수미상관적 표현법으로) 거의 같은 모양새로 그녀들에 의해 그곳에서 방출당한다. 게다가 그를 최종 사망시킨 것은 숲 속의 버섯이니 그는 숲이라는 요단강 속에 발을 담근 순간부터 이미 죽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여성이란 존재는 정말로 '질투의 화신'인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자신의 다리를 절단한 이유가 본인이 탐해주지 않아서라고 울부짖는 존의 말에 부정도 긍정도 아닌 미스 마사(니콜 키드먼)의 태도가 좀 괴이하지만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러다가는 제 것으로 만들지 못하겠는지 거의 처절하다 싶은 타이밍에 그와 섹스를 나누는 에드위나(커스틴 던스트)의 행동도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이해가 된다. 무엇보다 에드위나가 그를 독점하자마자 그녀의 동의 없이 그의 살해 계획을 모략한 나머지 여성들의 태도도 '질투심'이라는 토대로 모두 설명이 가능하다. 이 논리가 맞는다면 미스 마사는 정말 무서운 여자다. 정작 다리 절단은 본인이 했으면서 모두를 공범으로 만들고 죄의식을 공유하게 하기 위해 버섯을 아이에게 채집하게 하고 존으로 향하는 죽음의 독버섯 급행열차를 최종 전달하는 것도 또 다른 아이에게 맡기지 않았던가.
'매혹당한 사람들(The Beguiled, 2017년 作)'
아마도 지독한 규율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절한 방임주의가 아닌 체계적이고 꽉 막힌 미스 마사의 훈육 정책이 이들을 오히려 쉽게 유혹 당하게 만드는 역설적 상황에 당착하게 만든 이유일 것이다. 먹고 사랑하고 기도해야 하는데 먹고 기도만 하는 사육에 가까운 그녀의 교육방식. 이들은 욕구불만이 되기에 충분히 당연한 상황에 봉착해있다. 그 욕구를 풀 대상들은 모두 전쟁에 출전하였으니 어쩌면 그녀들 각각의 마음속에 내재된 욕구에 대한 우주적 갈망이 존을 이곳으로 이끈 것일지도 모르겠다. 만유인력의 법칙의 여성 편향적 작용.
그런데 필자는 그녀들만을 면박 주고 싶지 않은 게 존의 행동거지가 상당히 문제가 있다. 기본적으로 연식에 관계없이 모든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그의 태생적인 기질. 점점 그녀들의 은밀한 손길과 눈길을 즐기기 시작하는 나르시시즘. 사랑은 정갈한 에드위나와 하려 하고 섹스는 젊고 관능적인 엘르 페닝(알리시아)과 하려 하며 그 와중에 미스 마사에게도 집적대려는 카사노바의 전형. 그런 면에서 존 또한 유혹당한 사람이다. 본인의 매력에 혹은 그녀들에게 아니면 7명의 여인 속에 파묻힌 한 남자의 발칙한 상상에. 죽을 정도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다리 하나 내어준 것은 적절한 벌이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영화상 잘린 것이 다리였지 실제 의도는 다리와 다리 사이의 그것이었을 것이라는게 지극히 개인적인 추측이다. 박찬욱의 <아가씨>의 마지막 백작(하정우)이 지켜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것. 혹은 그곳.
<매혹당한 사람들>이 남성의 여성편력에 혐오적 자세를 취하는 영화라고 확신하는 것이 그녀들의 공간에 잠시 들어와서 허기'만' 달래고 가는 두 명의 남군 군인들은 망자가 되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가는 시퀀스 때문인데, 매혹적인 여성들이 있는 공간임을 알면서도 모종의 시선 한번 던지지 않고 인간의 3가지 욕구 중 단 한 가지만을 채우고 나가는 이들은 영화가 절대로 손을 대지 않는다. 이 태도는 분명 존을 대하는 태도와 비교되며 이 입장을 밀고 나간다면 페미니스트적 영화라 해도 일정 부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필자는 매혹을 당한 자는 누구이며 매혹을 한자는 누구인가를 자문한다면 8명 전부라고 답하겠다. 이런 유혹의 지뢰밭이라는 관점이 극대점을 찍게 되는 순간은 그녀들과 존이 함께하는 첫 번째 저녁식사 자리. 존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분명한 옷매무새의 변화가 관객들을 웃음지게 하지만 디테일한 액세서리 하나까지 포착하는 그녀들의 견제는 못내 무시무시하다. 즉, 식사 자리는 오붓한 손님맞이용 상찬이 아니다. 유혹하는 주체와 객체가 합일의 순간에 다다르게 되는 유혹의 소나타이며, 그 메커니즘에 취해 양껏 즐기고 있는 한 남자의 최후의 만찬이다. 이와 같은 오묘한 그들의 심리가 꽤나 공감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인간이라는 존재 특히 여성이라는 존재의 내면을 설득적 어조로 보이게 축조한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연출력과 배우들의 호연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은 정녕 망자일까? 혹은 타락한 천사일까? 아니면 질투의 화신으로 보면 어떠할까? 그녀들의 존재론적 입장이 어떻든 이제 관계는 산산조각 났다. 영화의 마지막 화면 가득 채운 대문의 창살에 분절된 그녀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자. 굳이 문밖으로 나가 비좁은 창살 기둥 각각에 그녀들의 얼굴이 유실되도록 맞춰놓은 위치 설정을 떠올리자. 공간으로 본다면 현세와 이공간을 재(再)분절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고, 집단으로 본다면 구성원 사이의 회복 불능의 치명적 균열에 대한 표현법일 것이며, 개인으로 본다면 내면과 외면이 어긋난 직후에 대한 메타포가 될 것이다.
뭐가 어쨌든 전쟁 따위나 벌이는 우매한 남성들 위에는 늘 여성들이 있다. 게다가 서두에 언급한 질투심이라는 것도 그 원론적인 동인을 찾아보면 성욕이라는 답이 나온다. 그런 관점에서 문득 드는 망상. 미스 마사가 잘라낸 존의 다리는 치료나 질투 혹은 질책에 기인한 것이 아닌 스멀스멀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욕망이라는 전차를 절단하려는 정숙한 여인의 필사의 노력은 아니었을까? 바늘로 허벅지 찌르기의 변주적 행위.
끝맺음. 세상을 지배하는 남자, 그 남자를 지배하는 여자. 모두를 지배하는 섹스.
★★★☆(별 3개 반)
전쟁 따위나 벌이는 우매한 남성, 그 위에 여성, 그 위에 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