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대뉴욕(On The Town, 1949년 作)
뉴욕에서 벌어지는 하룻밤의 소동극이니 한국어 번역 제목에 '뉴욕'이 들어가는 것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도대체 왜 '대(大)'라는 사대주의적 단어를 끼워 넣은 것인지는 당최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조금 더 딴죽을 걸자면 원제 <ON THE TOWN>은 '(특히 밤에 식당·클럽·극장 등에 다니며) 시내에서 노는' 정도의 의미인데 왜 한국식 작명은 <춤추는 대뉴욕>이라는 과하게 직설적이라 진부하기까지 한 제목을 선택했을까? 물론 탄생이래 처음으로 뉴욕이라는 도시에 발을 내디딘 해군 3인방의 입장에서 이 도시는 커 보였을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지극히 개인적 주관으로 역설적 발현을 위한 명명이라고 과대평가할 생각이다. 전혀 '대'하지 않으니까 '대'라는 수식어를 박아 넣었다고 말이다. 그러면 뉴욕은 대(大)가 아니라 반대로 '소(小)'일까? 그것도 좀 무리가 있다. 내가 볼 땐 '무(無)'다. <춤추는 대뉴욕>은 시종일관 노래와 춤으로 왁자지껄 떠들어댐에도 기묘한 내적 공허함이 흐르고 있다. 속빈 강정. 서늘한 천공.
구조적 접근. <춤추는 대뉴욕>은 부두에서 일하는 크레인 노동자의 출근길 투정 섞인 노래로 시작하여 다시 그의 노래로 막을 내린다. 이른 아침 아직 잠도 깨지 않는데 일을 하러 나가야 된다고 앙앙대는 그의 노래는 달콤한 멜로디 속에 삶의 팍팍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영화의 개폐를 이루는 수미쌍관의 구조는 결국 뉴욕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반문을 하게 만든다. 뉴욕의 속을 이루는 것은 뉴욕의 부르주아일지 매일 밤 파티로 마무리하는 뉴요커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작과 끝을 담당하는 것은 뉴욕의 소시민들 혹은 외부자들이다.
남녀 주인공 각 캐릭터들의 배경을 들춰보는 것으로 논지를 이어가겠다. 게비(진 켈리)와 아이비 스미스(베라-엘렌). 게비는 정처 없이 바다를 표류하는 해군으로 단 하루 뉴욕에 발을 디딜 수 있는 사람이다. 즉 그는 본질적으로 뉴욕에 정착하는 것이 불가능한 완전한 외지인이다. 아이비는 어떠한가? 그녀는 뉴욕에 정착하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아무도 몰라보는 '6월의 미스 지하철'이라는 무(無) 명예 타이틀만 거머쥐었을 뿐 결국 뉴욕 부르주아들을 위해 거리의 공연을 하는 삶을 살고 있는 가여운 여인이다. 즉, 이들은 비(非) 뉴요커이다. 뉴요커가 될 수 없거나, 되지 못했거나. 결론적으로 이들은 부두의 노동자와 사회 지위적, 현재 처해진 상황적 맥락의 궤를 같이한다. 뉴욕에서 춤을 추는 것이 아닌 뉴욕을 위해서 춤을 추는 사람들. 뉴욕을 향해 동경의 제스처를 수없이 보내지만 어떤 리액션도 받지 못하고 있는 매혹당한 사람들.
무엇보다 그들은 동향(매도우빌) 사람이다. 출생 기원의 공통점은 타지에서 더욱더 빛을 발하기 때문일까? 그들은 2차 세계 대전 직후의 뉴욕의 발전 속도만큼 빠르게 정서적 교감을 나눈다. 그런 입장에서 사실상 러브씬인 영화의 중반쯤 등장하는 그들의 군무는 각자의 심연에 내재된 향수병이 물화된 것이며, 깊은 곳에 잠식하고 있던 타지에 대한 공포와 타지로부터의 상처가 섹스로 위무된 것이다.
'춤추는 대뉴욕(On The Town, 1949년 作)'
해군 3인방: 게비, 칩(프랭크 시나트라), 오지(줄스 먼신). 애당초 뉴욕은 이들에게 불친절했다. 뉴욕에 막 입성한 천둥벌거숭이들은 행인에게 지리를 묻지만 목소리는 지하철에 철저히 파묻히고, 힘겹게 탑승한 지하철 좌석은 아이들에게 빼앗기기 일쑤다. 인산인해를 이루는 레스토랑에서는 돈 몇 푼 쥐여주면 미스 뉴욕 지하철을 알아보며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비정의 뉴욕. 무정의 도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이들은 끝까지 뉴욕에 대한 예찬론자이며 사대주의자들로 남는 것일까? 왜 이들은 도착한 순간부터 명소에 자신들의 족적을 남길 때마다 <NEW YORK, NEW YORK>을 불러대는 것일까? 19세기 철학자 짐멜에 따르면, 19세가 말 대도시가 등장하면서 대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들은 일종의 이미지의 홍수를 겪으며 신경과민 증상을 겪고 있는 셈이라고 하였는데, (물론 한 세기가 지난 후의 영화이지만) 함선이라는 소(小) 세계에 살고 있던 해군들에게 뉴욕이라는 대도시와의 직면은 일종의 정신질환을 유발한 것은 아닐까?
다른 관점에서 인상적인 시퀀스 (혹은 대사)를 집고 넘어간다. 인류학자 클레어 허드슨(앤 밀러)은 오지의 얼굴이 유인원의 골격과 유사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추파를 던진고 사랑에 빠진다. 이 시퀀스가 참 묘한 것이 그녀가 사랑에 빠지는 원인은 가식 없고 이유도 없고 기억도 없는 선사시대 남자가 좋기 때문이란다. 자제하지 않고 자유로운 남자. 필자가 보기에 이것은 시대적 관점으로 이해 가능하다. <춤추는 대뉴욕>은 1949년 작품이다. 막 2차 세계대전을 승전으로 끝내고 번영과 성장이 태동하는 시기가 배경이며 영화를 창조하고 있는 세계도 동일 시대이다. 발전 속도가 빠르다는 것은 탈락자들이 많다는 다른 말이기도 하고 탈락하지 않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동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 혹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버린 사람들. 그로 인해 등장하는 고개 숙인 남자들. 클레어의 춤사위는 그들에 대한 불만족의 뮤지컬적 표출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영화가 보여주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포착하여 거의 난삽하듯이 끄적거려 놓았는데 결론은 다음과 같다. 그것이 무엇이든 어떠한 거대한 '변혁'이 이 영화 속의 여러 가지 상황들을 축조했다는 것. 아마도 영화는 이것이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니 단 하루 풋사랑을 하는 이들을 어떠한 아쉬움이나 질척거림 없이 본연의 공간으로 분리시키고 결코 그들 중 단 한 커플도 사랑의 결실을 맺어 뉴욕에 뿌리내리게 만들지 않는다. 그들이 작별하는 바로 그 순간 도착하는 또 다른 해군 3인방은 다시 <NEW YORK, NEW YORK>을 부르며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데, 이것은 결국 폐곡선의 구조를 완성시키며 무한히 반복되는 소용돌이를 만들어 내는 격이 된다. 향수도 애환도 질환도 노동도 이제 재시작 되는 것이다. 반복이 만들어 내는 태풍. 태풍의 눈 속에 존재하는 공허함을 동반한 고요함. 서두에 언급한 '무'의 세상.
아무리 휘젓고 다닌다 한들 뉴욕은 결코 춤추지 않는다.
★★★☆ (별 3개 반)
뉴욕은 춤추지 않는다. 뉴욕을 동경한 외부자들의 발악만이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