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대형(The Big Boss, 1971년 作)
관객이 손꼽아 기다리는 이소룡의 모습은 영화의 1/2 혹은 2/3 지점에 등장한다. 다행스럽게도 <사망유희>때처럼 대타가 등장하여 관객을 우두망찰하게 만든다는 뜻은 아니고, 이소룡의 영화를 볼 때 우리가 쾌감을 느끼는 면면들의 등장 시점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절권도를 바탕으로 한 액션, 웃음과 울음 사이의 페이소스적인 표정, 자신의 목청을 쥐어짜는 짐승의 포효 등. 영화는 타이밍을 최대한 뒤로 늦추기 위해 '더 이상 주먹질을 지양하라는' 노모의 숙원을 떠올리는 방법을 통하여 타이밍 지연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가장 보기를 원하는 장면들을 최대한 질질 끌며 감칠맛을 당기는 밀당의 작법. 열길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방법론.
이것은 참 구태의연한 구습이기는 한데, 굳이 편을 들어주자면 어쩔 수 없는 작법이기도 하다. 본인의 첫 주연 장편영화인 만큼 대중적 성취에 대한 청운의 꿈이 거대했을 것이고 가장 원초적인 해결법은 기존의 성공했던 방법론을 재현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기에(물론 이것은 필자의 사견이다). <당산대형> 이전의 많은 영화들 혹은 이후의 많은 영화들에서 대중들의 최대 카타르시스를 폭발시켜주는 장면들의 등장 시점은 중반 혹은 중후반 부일 때가 많았고 이 영화는 그 자장 속에서 형성된 영화라는 뜻이다.
잠시 시점에 대한 문제 고찰. 한 영화에서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 혹은 가장 중요한 요소가 등장하는 타이밍에는 두 가지 방법론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기존의 패턴(1/2 혹은 2/3 지점에 등장)을 차용하되 기대 심리를 완벽하게 충족시켜 줄 쾌감을 선사해 주는 방법. 예를 들어 쿠엔틴 타란티노의 <장고: 분노의 추적자>. 타란티노의 웨스턴에서 우리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장면은 뭐니 뭐니 해도 혈흔이 낭자하는 총질의 시퀀스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가장 극한의 쾌락을 선사하는 장면은 후반부에 등장하는데(캘빈 캔디의 저택에서의 총질 시퀀스), 우리는 분명히 가슴 한편에 그런 장면이 나오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으면서도 얄미울 정도로 세련된 그의 편집력에 넋을 잃게 된다.
두 번째, 규칙 파괴. 기존의 성공의 레퍼런스를 따르지 않고 본인만의 스타일로 재창조한다는 뜻. 예를 들어 봉준호의 <괴물>.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서슬 퍼런 괴물을 모습을 카메라 앞에 완전히 포착시킨다. '당신들이 보고 싶은 것을 지금 당장 보여주겠다. 어차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이니'라고 말하는 듯이. 말하자면 두 가지 방법론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기존의 개발된 도구를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 기존의 없던 도구를 얼마나 신선하게 개발하느냐. <당산대형>은 전자를 따르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영화이다.
'당산대형(The Big Boss, 1971년 作)'
<당산대형>은 필자를 당황시키는 다소 난해한 측면들이 존재한다. 토막살인, 납치, 서스펜스라는 육체파 이소룡과는 사뭇 이질적인 상황적, 장르적 설정과 작법들. 우리는 최초로 단도를 든 그의 모습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영춘권적 도리(그러니까 무도가로서의 도리)에 어긋나는 자기 파괴적 설정이다. 심지어 성매매를 자행하는 정조안(이소룡)의 모습을 꽤나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영화의 어느 시점부터 관객은 어느 누구에게도 마음 둘 수가 없는 아이러니한 상태에 직면하게 만든다. 섹스와 폭력이 뒤섞인 히치콕적 상황 설정. 정조안에게서 '정의'라는 코드를 표백시키면서 선악의 관계를 기괴하게 비틀어 버리는 아이러니한 캐릭터 축조. 강한 어조로 가정컨대, 이런 면들 또한 구습 차용에 따른 예기치 못한 산물일 것이다. 그간 영화들의 나름의 성공 코드를 차용하고 뒤섞어 만들어낸 기괴한 공산품. <당산대형>은 졸작이나 망작 혹은 평작이라기보다는 '괴작'에 가깝다.
주제적 측면에서의 해체. <당산대형>의 모든 사건의 시작과 종결을 구성하는 키워드는 폭력이다. 굳이 두 집단을 최악과 차악으로 나눈다면, 우선 최악에 속하는 회사 사장 집단. 폭력을 앞세워 노동력을 착취하고 태국의 한 차이나타운을 장악하는 그들의 행보는 폭력의 정수이며 여기에 자본주의적 측면의 계급 폭력까지 더해지니 그들은 근원적 '악'이다. 다음은 차악에 속하는 정조안. 폭력을 더 큰 폭력 응징하는 그의 태도. 공권력이 제 기능을 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는 해도 딱히 향락에 쉽게 고꾸라지는 그의 행보를 지지하고 싶어지지는 않는다. 즉, '법보다 가까운 주먹'이 이 영화가 관통하는 주제라면 주제겠다.
자신을 대형으로 추켜세워주던 이들이 전원 사망하고, 정서적 교류를 이루었던 여인과는 결실을 맺지 못하며, 거대한 폭력으로 모든 것을 응징한 후 작렬하게 체포되기에 이른다. 디스토피아적 세상 궤멸을 위해 그 세상을 만들어낸 영화 속 기능하는 모든 것들이 자멸하는 논개적 결론. 답이 보이지 않으니 문제 자체를 사장시키는 묘수 혹은 자충수. 의도한 것이든 우공이산적 결론이든 다소 황당하지만 색깔과 인장은 뚜렷하다.
<록키 호러 픽쳐 쇼>와 같이 괴작들은 시간을 관통하며 컬트가 되기 마련인데, <당산대형>은 그 행보를 걸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영화가 등장한지 이미 약 40년이 지났으니 어느 정도 답은 나온 것 같지만.
★★★ (별 3개)
안 좋은 쪽으로 괴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