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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an 29. 2018

시를 위한 시

패터슨(Paterson, 2016년 作)

1.

일주일 동안 패터슨(아담 드라이버)은 3가지 난항을 겪는다. 여느 날처럼 운전하던 버스가 퍼졌고, 밤마다 애완견 마빈을 산책 시키며 들르던 바에서 지인 에버렛(윌리엄 잭슨 하퍼)의 스티로폼 권총 자살 소동을 저지했으며, 자신의 창작활동을 빼곡히 적어 놓은 노트를 마빈이 갈갈이 세절해놓았다. 평범한 일상을 침입해오는 불가항력적인 일들. 이때 '시(Poem)'는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오히려 도움이 될법한 것들은 스마트폰, 군인으로 복무했던 패터슨의 과거 이력, 복사기 정도였을 것이다. 그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시의 무용론(無用論)을 체감했던 것은 아닐까? 그것이 그가 시를 놓으려고 했던 이유는 아니었을까? 어느 예술가가 시한부 판정을 받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문학작품을 전부 찢었던 것처럼 말이다. 결국 그는 자신의 시 작업 장소(폭포 앞 벤치)에서 우연히 만난 일본 시인(나가세 마사토시)의 '당신은 시인입니까?'라는 질문에 '아니'라고 답한다. 그런데 나는 패터슨에게 반문하고 싶다. '예술이 언제부터 삶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해야 했었습니까?'


짐 자무쉬가 영화의 시화(化) 혹은 시의 영화화(化)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구언이 되었다. 그의 출세작 <천국보다 낯선>에서는 시퀀스 사이마다 블랙아웃 쇼트를 삽입하여 영화의 구조를 일종의 시의 연(Verse)으로 만들어 놓는가 하면, <지상의 밤>에서는 옴니버스 구조를 차용함으로써 애당초 연의 구조로 영화를 구성하기도 하였다. 그런 그의 필모그래피의 맥락에서 <패터슨>은 나에게 조금 다르게 다가오는 측면이 존재한다. 물론 나에게 <패터슨>은 짐 자무쉬와 만나는 고작 4번째 영화이기에 무리한 일반화를 하기 두려운 면이 있지만, 시적 구조가 아닌 이렇게 노골적으로 시 자체를 영화 속으로 끌고 들어온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패터슨>에서는 주인공이 시인이면서, 그가 읊고 쓰는 시를 스크린에 작성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누가 봐도 '이 영화는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작법이다. 그는 시라는 예술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토로(吐露)가 필요해졌다고 생각한 것일까?


내 생각에 자무쉬는 '시란 결국 반복과 균열의 교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패터슨>은 월요일 기상으로 시작해 다시 월요일 아침으로 끝나는 8연의 반복 구조와 수미상관 구조로 되어있으면서도, 하루하루 속으로 현미경을 갖다 대면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는 미묘한 변주를 내포하고 있다. 동네 운전기사인 패터슨의 직업의 궤적은 매일매일이 같은 루트를 운전하는 반복 행위이지만, 그의 버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루도 같은 날이 없으며 영화는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버스가 지나가는 경로의 어느 지점을 보여주면서도 단 한 번도 같은 곳을 화면에 비추지 않는다(즉 우리는 버스가 지나가는 운행 루트의 서로 다른 조각들만은 보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영화 <패터슨>은 시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며, 그 속에 패터슨의 삶 또한 시의 구조로 되어 있다. 구조라는 외연의 안쪽에 삶이라는 내연으로 들어가 보면 어떠할까? 일본 시인의 말대로 라면 어느 시인의 소재가 될 수 있는 패터슨의 삶 자체는 이미 시적이며, 무엇보다 패터슨은 버스 운전기사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즉, '시'라는 영화 속에 '시'적인 삶을 살고 있는 주인공은 '시'를 작성하고 있는 '시인'이다. 이런 몽중몽적인 삶의 시화라니. 패터슨에 살고 있는 패터슨,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중 한 명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의도적인 회문(回文)은 시와 삶의 물아일체(物我一體)를 일으키며 결국 '시는 삶이고 삶은 시'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2.

근작 <러빙 빈센트>에는 빈센트 반 고흐가 일상의 스쳐 지나갈 수 있는 대상들의 본질을 보기 위해 고민했다는 흔적이 그려진다. 비슷한 맥락으로 진중권 교수가 인상주의 미술이라는 것이 자신이 본 세상을 자신이 본 데로 그려내는 화풍이라는 설명을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술가의 예술 과정 동안 자신이 보고 있는 세상은 남들과 다른 자신만의 세상이 되는 것이지는 않을까? 또한 예술은 오감 아니 육감을 통해 흡수한 세상의 면면들의 본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내는 행위는 아닐까?


패터슨의 첫 번째 시에 시상(詩想)이 된 오하이오 '블루'팁 성냥. 시를 생각하는 동안 그의 마음속에 채우고 있던 파란색 영감(靈感)은 그의 세상의 곳곳을 파랗게 만들어 놓는다(그의 집 벽지, 그의 옷 등). 패터슨은 7일 동안 약 3~4 쌍의 쌍둥이를 목격한다. 그들의 외연은 같다. 그러나 그들은 엄밀히 파고들면 다른 사람이다. 그의 집에 놓여있는 애완견 마틴에 대한 두 개의 초상화에 대한 패터슨의 시점 쇼트. 하나는 일종의 추상화이고, 하나는 일종의 캐리커처다. 같은 대상으로 그린 두 개의 그림은 분명히 다르다.


결국 그의 루틴해 보이는 7일의 궤적 동안 그의 모든 체험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행위이면서 동시에 예술적 행위의 과정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그의 삶과 시는 맞닿아 있다.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근엄하며 더 중요한 무엇이다. 역사가 말해 주는 것은 독특한 것들이지만, 시가 말해 주는 것은 보편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예술가는 자신의 자서전을 쓰는 것이다. - 해브록 엘리스


결국 자무쉬가 밀고 나가는 시와 삶의 일치의 목적은 사람들이 시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일종의 경외심 같은 것을 표백하기 위한 행위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시는 특수한 어떤 것을 소재로 하는 것이 아닌 결국 보편적인 것들을 말하는 매개체이며, 해브록 엘리스의 말처럼 예술 행위는 삶을 뛰어넘는 어떤 것이 아닌 내 삶 속 곳곳에 묻어 있는 것이라는 말. 우리의 삶이 시이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다른 말. 만약 내 생각대로 <패터슨>이 정말로 자무쉬의 시에 대한 토로라면 말이다.




3.

시대적 맥락에서 보면 스마트폰과 복사기와 같은 문명의 이기는 현재의 삶을 편리하게 해주었을 뿐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다. 군인이었던 패터슨의 과거는 지금의 삶을 만들어주었지만 지금의 삶 그 자체는 아니다(그는 지금 군인이 아니다). 그런데 시는 과거, 현재에도 존재했으며 아마도 미래에도 이어질 시대를 관통하는 것이다. 시점을 현재로만 좁혀도 마찬가지다. 시는 언급한 것들(스마트폰, 복사기, 과거 이력)처럼 특별한 상황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출근하기 전 침대에서 속삭였던 사랑하는 여인의 꿈 이야기가 나의 시의 시상이 되고, 오늘 버스에서 우연히 들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의 시상이 되며, 바에서 먹은 맥주 한 잔을 위에서 내려다보며 느낀 모종의 감정이 나의 시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진정 언제 어디서나, 시대마저 초월하여 존재하는 시는 삶이고, 삶은 시라고 말하는 자무쉬의 말에 동의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이러한 결론은 '시(예술)가 삶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하는 것인가?'라는 나의 서두의 질문 자체를 오류라고 선언하는 셈이 된다. '삶이 삶을 위해 기능적으로 작용해야 한다'라는 난해하고 어불성설 격의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시의 효용성을 말해달라 하면, 일평생 똑같은 날을 살 것만 같았던 한 남자의 삶에 단조로움을 제거하고 리듬을 가져다주며 풍요롭게 하지 않았냐고 말할 수 있겠다. '왜 예술을 하냐?'라는 질문에 '나 행복해지려고 한다.'라고 답하라는 소설가 김영하의 말처럼.


그러니 패터슨은 다시 시를 잡아야 한다. 빈 종이에 서는 예술가의 공포가 엄습해 올지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시상은 특별함이라고는 없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행위 그 자체에서 구할 수 있으며, 따지고 보면 그는 매일매일이 다른 삶이라는 시 속에 살고 있으니 그의 삶 곳곳에서 무궁무진하게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패터슨>은 '삶이라는 시를 위해 작성한 영화라는 짐 자무쉬의 한편의 시'이다.


패터슨의 시는 이제 끝났다. 마지막 쇼트는 패터슨이 떠난 자리에 홀로 누워있는 로라(골쉬프테 파라하니)의 모습이다. 우리는 가정주부라는 루틴 한 삶 속에 그녀의 삶이 얼마나 다채로웠는지 보았다. 우리는 그녀의 삶도 시였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패터슨>의 두 번째 편은 <로라> 일지도 모르겠다.




★★★★ (별 4개)

삶이라는 시(詩)를 위해 작성한 영화라는 시(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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