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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Feb 05. 2018

카오스와 코스모스

열차 안의 낯선 자들(Strangers On A Train, 1951)


     

예를 들어 피카소의 작품 <화가와 모델>과 같이, 그의 추상미술이 추구하는 본질이 인간의 움직임을 최소한의 선으로 포착하려던 행위였던 것처럼, 한 명의 인간의 인생길을 극단적으로 간략화한다면 결국엔 하나의 '선'으로 수렴될 것이다. 직선이든 곡선이든 간에 역방향으로 되돌아올 수 없는 일방통행의 행보. 각도와 길이가 제각각인 각자의 선들을 따라 움직이다 보면 두 가닥 혹은 그 이상의 선이 만나는 순간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필연 혹은 우연이라고 부르는 만남의 접점들. 우리는 삶 속에서 이 순간을 관통하게 되면 변화량의 진폭에 관계없이 타인의 선과 접하기 직전과 직후의 길에는 미세하게라도 변형이 생기기 마련이다. 서로 다른 우주가 충돌했을 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 어쩌면 이것은 자연의 섭리.


영화의 처음을 떠올려야겠다. 차에서 내리는 가이 헤인즈(팔리 그레인저)와 브루노 안소니(로버트 워커)의 구두가 등장하는 쇼트. 좌에서 우(가이), 우에서 좌(브루노)로 이동하여 교차점을 형성하는 그들의 발걸음의 동선. 여러 가닥의 기찻길이 교차되는 몽타주로서의 쇼트. 마지막 열차 안에서 구두가 부딪히는 낯선 자들. 영화 시작 직후의 약 4개 이상의 연속된 쇼트들은 두 가닥 선이 교차하기 시작하는 시작점이자 각자의 세계에 타인이 침범해 미묘한 비틀림을 발생시키는 순간이다. 어쩌면 이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었던 것이 기차의 '한 칸'이라는 좁디좁은 공간에 인물을 몰아넣어 놨으니 충돌의 확률은 높아지기 마련이지 않겠는가? 그런 입장에서 (물론 그의 모든 영화에서 그렇지만)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히치콕이라는 전지전능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인간 생태에 대한 실험 같아 보이기도 한다.


필자는 서두부터 인간의 삶은 각자의 선을 좇는 행위라고 언급했는데 이 선들을 한데 뭉쳐 놓으면 중구난방적인 양태를 보일 것 같지만, 일반적으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만약 선을 따르는 주체가 모두 가이와 같은 보편적인 수준의 정상인들이라면 이들이 이루는 선들과 접점의 모양새의 취합은 전지적 시점에서 보았을 때 그물 구조와 같은 나름의 규칙을 가질 것이라는 게 필자의 추측이라는 뜻.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세상은 일종의 무한히 반복되는 패턴화가 되어 나름의 안정화가 되어 있다는 뜻인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그런 일반적이고 단조로운 프랙털(fractal) 구조는 히치콕의 관심사항이 아니다. 그는 여기에 브루노라는 비보편적인 인물을 위치시키고 그로부터 유발되는 소용돌이의 작용을 관찰하고자 한다.


어느 정도의 혼돈은 삶 속에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브루노는 어느 수준의 경계를 뛰어넘는 혼돈을 유발하는 인물이다. 모두가 선으로 이동할 때 홀로 원을 그리는 자. 모두가 테니스 공의 핑퐁을 좇을 때 홀로 정면을 응시하는 자. 그런 입장에서 필자는 이 영화가 일종의 실험 같다고 언급한 것이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공존하는 세상. 희극과 비극이 겹쳐있는 세상. 히치콕의 인간 생태 실험실.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열차 안의 낯선 자들(Strangers On A Train, 1951)'



필자가 만남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일종의 '충돌'은 기본적으로 낯섦이 낯익음으로 변화하는 순간일 텐데, 이것을 성급하게 일반화할 수 없는 것이 충돌의 결과물에는 꽤나 불가지론적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남이 반복되어 낯익음이 짙어지게 되면 관계는 더욱 견고해질 것 같지만 때론 역설적으로 붕괴에 이르기도 하는데, 가이와 미리엄은 무수한 접점을 소유했음에도 이혼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되려 하고, 무엇보다 출생 신분적으로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접점을 소유하고 있는 브루노와 그의 아버지는 이미 살해라는 단어가 등장할 정도의 환멸의 관계가 되어 있다.


'인물들의 교차라는 행위의 결과의 불가해함'에 대한 예시 찾기를 다소 지엽적인 측면까지 밀고 나가겠다. 가이를 감시하던 형사는 어느 순간 용의자의 입장을 옹호하는 스톡홀름증후군적인 의식의 흐름을 보이기도 하고, 브루노는 미리엄과의 한 번의 접점으로 인해 그녀와 닮은 바바라 모턴(패트리샤 히치콕)의 모습을 보고 정신이상적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혹은 가이의 무죄를 증명할 유일한 목격자였던 콜린스 교수와의 만남은 접점의 시작점에 비해 두 번째 교차점이 오히려 더 낯설어지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방증의 결과물은 가이와 브루노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사망하는 미리엄 그 자체일 것이다. 충돌이 주는 일종의 나비효과들.


그런데 이 충돌은 인물 '간'의 문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인물 '내'에서 발생하는 작용이기도 하다는 뜻인데, 나는 문득 이 영화에서 사용되는 '딥 포커스'의 원인이 궁금해졌다. (과잉 해석이라는 전제로) 그것이 인물들의 깊고 복잡다단한 내면에 대한 묘사라면 어떠할까?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의 내면은 무수히 많은 선들이 교차되는 또 하나의 (소) 우주일 것이다. 


예를 들어 가이는 법적, 도덕적 가치관을 지켜나가지만 내면 어딘가에 분명히 전 부인 미리엄(케시 로저스)에 대한 살의를 가지고 있었다(공중전화에서의 쇼트). Sen. 모턴(리오 G. 캐럴)이 주최한 파티에서 커밍햄 부인과 그녀의 친구는 브루노의 남편 살해 방법에 대한 설명에 꽤나 관심을 기울이기도 한다. 테니스 경기 직후 브루노를 저지하기 위해 고향(맷캐프)으로 향하는 가이, 그를 쫓는 경찰들이 올라탄 차에 있던 노년의 여성은 범죄자를 좇고 있다는 말에 재미있겠다며 흥미를 보이기도 한다. 도덕과 폭력을 동시에 사유하는 우리들. 희극과 비극의 교집합을 사유하는 우리들. 때론 외면과 내면이 배반적이고, 내면에 무수한 비밀의 방이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즉, 우리 내면의 밀실은 외적 세계와 마찬가지의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이합집산.


그러니까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은 내면의 소우주와 외면의 대우주가 뒤엉키면서 나뒹구는 세계, 그 와중에 패턴과 규칙을 부단히 유지하려는 자정작용을 하는 세계를 포착하는 영화인 것이다. 패턴과 규칙이 존재하는 난장판이라고 할까?




히치콕의 세계 혹은 히치콕의 실험이라는 열차가 종말에 다다를수록, 브루노가 일으키는 소용돌이의 존재는 가시화되어 '회전목마'라는 메타포로 완전히 물화되어 카메라에 포착되기에 이른다. 이 쾌속질주하는 회전목마는 서두에 언급한 그물형 세상에 침입한 혹은 그 세상에서 탄생한 돌연변이다. 이때 우리가 포착할 수 있는 인간 군상들. 갈팡질팡 혼돈을 지켜보거나, 정의감에 용기를 내어 몸을 내던지거나, 무력하게 소용돌이에 휘말려 버리거나. 어쨌든 붕괴되고 나서야 다시 정상적으로 기능하는 무수한 선들.


어디선가 불어오는 잔잔한 바람에 의해 나름대로 일정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호수. 그 호수에 거대한 바위 하나 던져놓고 상태가 원복 될 때까지 우두커니 지켜보는 영화. 세상 밖에서 턱 괴고 내려다보고 있을 조물주. 혹은 카메라 밖에서 킬킬대면서 지켜보고 있을 히치콕.




★★★☆(별 3개 반)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공존하는 히치콕의 인간 생태 실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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