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년 作)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필자는 1982년에 제작된 리들리 스콧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와 아직 만나지 못했다. 혹시 필자의 글에서 그 영화를 보지 않음으로 인한 무지 혹은 오해 같은 것들이 포착된다면 정정하거나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본론. 크레디트가 올라가면 라이언 고슬링의 배역 이름은 따옴표까지 사용하여 "K"라고 분명히 명기하고 있다. 여기서 드는 의문. 왜 "조"라는 또 다른 이름은 기입되지 않았는가? 아마도 영화의 태도는 그를 조라 명명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결국 그는 끝끝내 K다. 한편 그를 조라고 호명해주는 자들.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제외한다면 조이(아나 디 아르마스) 혹은 '당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준다'라는 광고 속 비대한 홀로그램 여인뿐. 이 두 여인은 (형용모순적인 표현이겠지만) 기계의 세상 속에 더욱 '기계적인' 존재들이다. 그들의 표면이 빗물과 닿는 순간 기계임이 자명함을 드러내는 영상으로써 기능하는 존재들. 형체는 있으나 실체는 없는 자들. 분명 그들은 리플리컨트와는 다르다. 즉, 그들의 입을 통해 뱉어진 ''조''는 한낱 신기루적 단어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영화는 데커드에게는 정확한 이름을 선사해주었는가?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잠시 인간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가? 의 질문을 고찰해보아야겠다. 어쩌면 인간은 (이 영화의 사유의 한가지 큰 줄기처럼) '기억'이라는 기능을 통해 존재론적 증명이 가능한 생물은 아닐까?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시간, 인간과 공간이라는 다양한 관계 맺음의 이음매가 되는 '기억'이라는 존재. 인간이 인간임을 방증하는 기억의 기능. 데커드는 자신의 옛 연인 레이첼(숀 영)의 눈동자 색깔까지 기억할 정도의 기억력을 보유하고 있다. 반면에 K는 본인의 기억에 대한 확신이 없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기억들도 주입된 기억이었다. 사실 그가 기억하는 짤막한 어린 시절의 단상 속에서 유일하게 그 만이 소년 중에 긴 머리를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그의 플래시백은 그의 것이 아님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기억하는` 데커드는 영화로부터 이름을 부여받았고, `기억하지 못하는` K는 이름을 부여받지 못했다.
여기서 '데커드=인간, K=기계'라는 무리한 도식화를 해버리는 것은 어불성설이 된다. 심지어 필자는 이 둘을 기계로 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든다. 사실 오직 영화만이 '껍데기'라며 이들을 기계로 규정할 뿐이지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을 기계로 볼 명확한 근거는 없다. 같은 음식을 섭취하고, 같은 적혈을 소유하고 있으며, 같은 성욕이 존재한다. 말하자면 이들에게도 생존에 대한 욕구가 동일시된다. 그간 보아온 껍데기 이면에 기어와 풀리의 메카트로닉스의 움직임을 보이던 인공지능들과는 분명히 차이가 존재한다는 뜻.
즉, 이들에게는 '인간의 되고 싶은 기계들'과 같은 단군신화적인 구태의연한 맥락이 침입할 자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영화가 규정지어주지 않는 인물 중 인간과 기계를 분간할 수 있는 관객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논지에서 조물주 윌레스(자레드 레토) 자리에 우리 각자의 조물주를 위치 시키고, K와 데커드 자리에 우리 자신을 위치시킨다면 결국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세계는 인간 세상을 우화적으로 메타포 한 세계로 도치된다.
그런데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통시론적 관점에서 데커드로 시작되어 K로 도달하는 역사의 변화 과정을 보았을 때, 이들이 기계라면 더욱 무감한 기계로 변모하였고, 이들이 인간이라면 더욱 기계 같은 인간으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기계화의 정도'라는 측면이 K가 조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아니었을까? 태양열을 발전하고 있는 듯한 태양열 흡수판의 정렬, 기계 쓰레기 더미 속에 살고 있는 아이들의 획일적 움직임. 데커드를 납치하는 웰레스 사 비행기 창문에 흐르는 빗물의 균일화된 이동 등. 패턴화들이 발산하는 기계적 감성들. '기계화'를 비판적 시선이 아닌 사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인간의 존재론에서 기계화까지 사유의 바다를 깊고 널게 헤엄치는 영화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Blade Runner 2049, 2017년 作)'
전혀 다른 관점에서의 이야기를 해보겠다.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사유는 '영화'라는 예술로까지 퍼져나간다. 데커드에게는 두 명의 자식이 있다. K와 아나 스텔리네 박사(카를라 주리). 영화에서는 스텔리네만이 자식인 것처럼 결론을 짓고 있지만 필자는 의미론적 측면에서 말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유일하게 기계를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등의 감정 쇼트는 이 세명이 분명히 공유하고 있지 않았는가? 이 지점에서 필자의 비약을 조금 더 극대화하겠다. 데커드를 영화의 '현전성' 정도로 보면 어떠할까? 이 논리를 밀고 나가 그가 배출한 두 명의 자식 K에게는 비평가, 스텔리네에게는 감독이라고 직함을 달아주어 보겠다(관객의 자리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기계화'된 세상에서 K는 기억의 불균질함 속 명징함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영화의 생식능력(그러니까 영화적 기적)을 단절시키려는 세력으로부터 영화(데커드) 혹은 비평가(본인)를 지켜내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그는 영화와 감독, 관객 사이를 오가는 피드백 시스템, 즉 순혈의 비평가로 보인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서두의 질문을 반추하여 그를 ''조''로 명명하지 않는 이유를 재질문 해본다면, ''K''가 지금처럼 남길 원하기 때문이라는 답이 가능하다.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감정놀음에 현혹되지 않으며 지금처럼 경계의 영역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으라는 뜻. 말하자면 영화와 감독과 기술과 관객 사이에서 주체적으로 주유천하 하라는 뜻.
마찬가지로 '기계화'된 세상에서 스텔리네는 그녀의 입으로 얘기했듯 기술로 상상력을 구현해내는 예술가이다. 이것은 분명히 영화감독에 대한 은유일 것이고, 필자는 그녀의 위치에 감독 드니 빌뇌브를 대입시켜 보고자 한다. 빌뇌브는 기술의 비약적 발전에 따른 영화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필자가 보기엔 오히려 그 반대다. 그가 전작 <컨택트>보다도 더 기술종속적인 영화를 만든 것은 그의 영화적 미학 혹은 태도로 보인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그의 미학이 뚜렷해지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구태 타파적 설정은 '사랑'의 궤멸이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유일하게 내뱉는 조이는 이름부터 사랑인 러브(실비아 획스)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러브 또한 자신만이 유일한 천사라고 앙앙대지만 결국 사유의 바닷속에 침몰되고 만다.
그러니까 빌뇌브의 이 영화는 모든 예술의 가장 많은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소재는 철저하게 사장시켜놓고 오로지 철학적 사유로써의 기능과 기술에 완전히 종속적인 특성만을 극대화해놓는 격이 되는 것이다. 기술을 배척하거나 숨기는 방식의 영화가 아닌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대한 이용하려는 태도. 그리고 그 속에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원적 질문을 담아내려는 사유. 그것이 빌뇌브의 2049년 미래의 영화를 대하는 자세는 아닐까? 혹은 무한의 속도로 발전하는 영화 기술과의 타협점은 아닐까?
자신의 역할을 다한 비평가(K)는 순백의 눈을 맞으며 순혈을 흘리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마리에트(맥켄지 데이비스)에게 자신의 유전자를 물려주었으니 '영화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또 다른 진검의 비평가는 재탄생할 것이다. 한 명의 비평가의 악전고투로 영화(데커드)와 감독(스텔리네)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만난다. 그리고 스크린이라는 벽을 두고 영화와 관객이 만나기도 한다. K가 사퍼 모튼(데이브 바티스타)과 격투를 벌이며 뚫었던 그 '벽'. 벽을 부수는 행위까지가 비평가들의 몫인가? 혹은 벽 앞에 그들을 마주하게 하는 것까지가 비평가들의 몫일까? 이 역할론에서 영화는 후자의 손을 들고 있다.
압도적인 스펙터클(시각과 청각)과 사유(뇌)의 경계에서 비평가라고 불리는 일군의 관객들은 유리벽 앞에 객체들을 올바르게 마주하게 하는 것까지가 역할이라는 이 영화의 태도. 그 답은 영원히 숙고해보아야 할 문제이겠지만, 분명한 점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사유의 바다에는 '영화'라는 예술에 대한 고뇌 또한 부유(浮游) 하고 있다는 점이다.
★★★☆ (3개 반)
인간의 존재론에서 기계화 그리고 영화에 대한 깊고 넓은 사유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