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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un 06. 2018

영화인가?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2017년 作)


영화인가? - '러빙 빈센트(Loving Vincent, 2017년 作)'


평소 영화(혹은 예술)는 결국 (광의의) 형식의 문제라는 생각을 하기에... (중략), 이때 형식은 카메라워크에서 플롯과 연기, 스타일 등등까지를 모두 다 포함한다... (중략), 말하자면 자신이 채택해서 쓰고 있는 형식에 대해 스스로 설명할 수 있어야 미학적으로 좋은 영화... (중략)


위의 문장은 이동진 영화 평론가가 오래전 자신의 블로그에 작성했던 것을 발췌한 것이다. 결국 그의 말대로라면 영화의 형식과 주제가 일치하는 순간, 아니 최소한 형식이 이야기와 교직하는 순간이 영화를 포함하는 모든 예술의 훌륭함에 대한 필요조건 정도가 될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상당 부분 동의한다. 그리고 영화를 본 후 느끼는 설명하기 힘든 감동의 근원을 저 문장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러빙 빈센트>는 분명 (최소한 나에게는) 감흥을 선사한다. 그런데 상당히 애매한 표현이지만 그 감흥이 '영화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왜 영화적이지 않은지 뚜렷한 이유를 설명할 재간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다. 물리학적 직관이라는 것이 있듯이 영화적 직관 그러니까 나의 가소로운 주관에 기인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서두부터 이동진의 저 문장을 끌고 들어온 것이다. 조금은 학구적으로, 형식과 주제의 일치라는 관점으로 이 영화를 해체해 보기 위해서. 그러면 이 영화가 주는 감흥의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에서. 영화 비평이 영화를 관통하는 것이라면 그러니까 한 영화를 여행한 나의 궤적을 남기는 작업이라면 내가 지금부터 작성하는 글은 비평이 아니다. 분석이다.



두 가지 형식!


<러빙 빈센트>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형식은 107명의 미술가가 그린 62,560 점의 반 고흐 빈센트의 그림체의 유화로 만들어진 영화라는 근원적 특징일 것이다. 거칠게 표현하면 영화의 모든 쇼트가 반 고흐의 작품이라는 뜻. 더 거칠게 표현하면 미장센이 형식이며, 그림체 자체가 이 영화의 가장 큰 형식 중 하나라는 말이 된다. 이유는 명징하다. 인상주의에서 현대 모더니즘으로 넘어가는 중대한 가교 역할을 한 빈센트라는 거장에 대한 존경 혹은 헌정. 조금 더 호의적인 마음으로 살을 더 붙여준다면, 빈센트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수면으로 끌어올려 대중들이 접근하기 편한 영화라는 예술을 통해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전파하기 위한 이유랄까?


<러빙 빈센트>가 취하는 두 번째 형식은 '인터뷰' 방식이다. 고흐의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전달해 주기 위해 시작된 아르망 롤랭(더글러스 부스)의 로드무비는 프랑스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도착하면서부터 아르망을 통해 고흐와 접촉했던 마지막 인물들을 사실상 인터뷰하는 형식으로 변모한다. 이 인터뷰는 하나의 상황에 대해 인터뷰어(Interviewer)의 관점이 선행하고 인터뷰이(Interviewee)의 관점이 후행하는 방식으로 반복되는데, 말하자면 어떤 대상에 대한 아르망 혹은 목격자의 주관적인 시점의 장면이 등장하고, 그 이후 그 대상과 대면하면서 주관이 일정 부분 전복되는 상황이 도래하는 방식이다. 이때 각자의 입장에 따라 카메라는 같은 장소에서 다른 각도로 상황을 재배치하며 각 화자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예를 들어, 빈센트가 최후를 맞이하기 직전에 그가 머물던 여관방의 풍광이 아들린 라부(엘리너 톰리슨)의 입을 통해 묘사될 때는 가셰 박사(제롬 플린)의 행동이 마치 그가 빈센트의 죽음과 관련 있는 듯 의뭉스럽게 묘사되지만 후반부 아르망과 가셰 박사의 직면을 통해 모든 입장이 정리되면서 의심은 해소된다. 이것은 빈센트의 최후의 순간에 그곳에 공존했던 대부분의 인물들에게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이때 오해와 해소를 반복하는 넘실대는 감정 선의 물결은 결국 아르망에게 이입돼있던 관객에게 전달되면서 우리도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정체 파악에 동참하게 된다. 이 과정은 결국 한 명의 인간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한 다각적인 접근법이다. 마치 입방체의 서로 다른 면들을 목격함으로써 최종 형상을 고차원적으로 떠올리게 되는 방식처럼 말이다.


영화 속 아르망의 빈센트에 대한 첫 반추는 그 유명한 '귀 절단'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그의 광인적 면모로부터의 시작. 나는 나 정도의 얄팍한 미술학적 지식을 가진 여러분들에게 감히 묻고 싶다. 지금까지 당신들의 빈센트에 대한 관념은 어땠습니까? 혹시 자신의 귀를 절단한 정신병자라는 수준에 머물고 있지 않았습니까? 물론 이 질문은 사실상 자문(自問)이다.


어쩌면 우리는 빈센트를 광적인 예술가 정도로 오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러빙 빈센트>의 인터뷰 형식은 한 인간을 바라보는 데에 필요한 다각적 관점의 중요성에 대한 피력인 동시에 빈센트를 향해 한갈래로 흘러 있던 우리의 의식에 대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작법이다. 말하자면 한 인간에 대한 무리한 일반화 혹은 편견의 궤멸 효과를 이룩하기 위한 작법. 즉, 빈센트에 대한 여러분의 선입견을 다층적으로 변모시켜야 한다는 일갈 혹은 바램. 결국 아르망과 우리는 이 방법을 통해 빈센트 반 고흐라는 한 명의 인간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된다.


이처럼 <러빙 빈센트>의 형식은 두 가지 목적에 기인한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형식과 말하고자 하는 바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음에도 나는 왜 이 영화가 당최 영화적이지 않은 것일까? 빈센트에 대한 오해 해소 보다, 그의 모사된 작품 62,560점을 보게 된다는 영광보다, 인간에 대한 접근법 재정립이라는 교육 효과보다 더욱 지배적인 생각은 단 한 가지다. 그래서 빈센트의 사망원인은 무엇인가? 그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두 가지 형식?


좀 역설적인 이야기인데, 이제부터 내가 위에서 분석한 <러빙 빈센트>의 형식에 대해 딴죽을 걸어보겠다. 우선 서두의 질문을 다시 끌어와야겠다. '<러빙 빈센트>는 영화적인가?' 몽타주와 미장센. 영화를 사랑하는 누구나 알만한 영화를 이루는 거대한 두 가지 작법. 일단 몽타주적 접근. 이 영화를 본 모두가 알다시피 <러빙 빈센트>에는 쇼트의 활공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스토리의 퍼즐 놀음만이 존재할 뿐이다. 즉, 거칠게 표현하면 이 영화에서 몽타주는 없다. 다음으로 미장센. '모든 쇼트가 빈센트의 그림체로 된 영화가 나온다.' 언뜻 들으면 미장센의 극단에 위치한 영화(그러니까 미장센의 끝판왕) 혹은 압도적으로 휘몰아치는 명화가 주는 폭풍 감동의 대향연의 영화 정도로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과연 <러빙 빈센트>가 취하는 '영화적' 미장센의 작법이 탁월했나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나는 '영화적'을 강조했다. 그리고 서두에 언급했듯 분명히 <러빙 빈센트>는 나의 마음을 울리는 감흥이 있었다. 즉, 내가 의문을 품는 것은 나의 감흥이 혹시 이 영화의 미장센 때문이라면 그것이 영화 내적인 미장센이었나?라는 점이다. 혹시 다른 무엇의 작용은 아니었을까?라는 의심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다. 95분 동안 살아 움직이는 빈센트의 작품 약 6만 점을 보는 것이 진정으로 관객에게 빈센트의 경이로움을 전달하는 유의미한 방법이었나? 차라리 95분 동안 빈센트의 <별이 빛나는 밤> 단 한점을 감상하는 것이 더욱 올바른 '반 고흐 관통법'은 아닐까?


물론 한 영화를 몽타주와 미장센만으로 결론짓는 것은 결코 부당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라진 몽타주와 결여된 미장센 이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러빙 빈센트>를 영화라는 예술의 범주에 넣는 데에는 쉽게 동의할 수가 없다(그럼에도 일단은 영화라고 칭하겠다). 말하자면 영화만의 기술을 통해 미술 작품을 빠른 속도로 관람시켜주는 <러빙 빈센트>의 방식은 결국 영화도 미술도 아닌 어중간한 경계의 영역의 예술에 그친다는 뜻. 오해하지 말자. 이 논지는 영화와 미술의 인접성과 상관성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과연 방법론이 영화만의 것인가에 대해 곱씹고자 함이다.


영화와 미술이 조화롭지 못하게 뒤섞여 있으니, 각각의 쇼트들의 인물과 풍광은 볼만하지만 쇼트와 쇼트가 연결되거나 스토리로 들어가면 영 단조롭다.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서스펜스 혹은 추리극이라는 장르적 외피를 입힘으로써 대중적인 붓 터치를 하는 것을 보니. 아이러니한 점은 서스펜스를 만들기 위한 방법론은 결국 <러빙 빈센트>가 취하는 인터뷰라는 형식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이다. '의심', '실체의 모호함' 등의 서스펜스 장르의 기본을 형성하기 위한 인위적인 작법. 서두에 언급했던 분명한 형식적 미학이 존재함에도 그림체 형식과 더불어 인터뷰라는 형식 또한 비판적으로 보이는 지점이 바로 이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장르 운용 때문에 나 같은 무지한 관객은 '빈센트의 작품에 대한 우아함'을 느끼기보다는 '빈센트의 죽음의 진실' 따위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이다. 결국 이 영화가 취하는 두 가지 형식은 빈센트의 훌륭함을 다시 한번 선포하고 그에 대한 대중들의 오해를 해소하겠다는 최초의 취지를 저해하는 격이 되는 셈이다. 일종의 자승자박(自繩自縛)?




결절(結節)


어설프게 나마 해체해보니 <러빙 빈센트>가 나에게 주는 감흥이 영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더욱 분명해졌다. 결국 나는 감흥의 원인에 대해 찾지 못할 것 같지만 어렴풋이 추측은 해볼 수 있겠다. 가끔 어떤 위대한 가수들의 음악을 감상할 때, 음악의 가치 혹은 수준보다는 매력적인 '톤' 때문에 그 음악의 모든 오점을 거세해버리며 정서적 일렁임이 발현되었던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러빙 빈센트>가 그렇다. 빈센트의 '그림체'의 재현. 빈센트의 화풍이 주는 압도적인 경이로움은 이 영화가 나에게 주는 불편한 진실들을 망각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게다가 이제껏 스크린에서 경험한 적 없는 이미지들이 다량으로 범람하니, 이미지의 홍수는 나에게 일종의 신경과민 증상으로 다가오며 신선한 충격을 주게 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19세기 철학자 짐멜이 말했던 일종의 대도시 증후군처럼. 


결론적으로 <러빙 빈센트>는 영화와 미술의 만남이라기보다는 기술과 미술의 만남이라는 표현이 적합한 영화이고, 내가 느낀 감흥의 근원은 영화보다는 미술에서 찾는 것이 맞겠다.




★★★☆ (별 3개 반)

미술과 영화가 아닌, 미술과 기술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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