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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Feb 17. 2021

[단편소설] 살인자와 영화광 1

첫 번째 방문자

  '자유는 작은 자유들의 총합으로 이루어진다' 


  아내가 떠난 첫날. 육중한 자유를 향한 첫걸음으로 치킨을 주문했다. 아이를 갖기 전 삼십대의 마지막 일탈이 필요하지 않겠냐고 은근한 허락을 구했다. 친구 놈과 질펀한 일본 여행을 떠나기 위한 얕은수. 이에 아내는 등가교환의 원칙으로 답했다. 간사이 국제공항과 프라하 바츨라프 하벨 국제공항 사이의 현격한 마일리지 불평등에도 불만이 없었던 이유는 나에게는 10일의 개인 생활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너에겐 10일의 여행, 나에겐 5일의 여행과 10일의 자유시간. 모든 유부남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딜이다.


 거실 인터폰에서 슈베르트의 <송어>가 흘러나온다. 희멀건 카메라 안쪽엔 스크린 도어 오픈을 요청하는 배달원의 모습이 보인다. 김 서린 오토바이 헬멧의 플라스틱 유리 부분만을 한껏 올린 내 나이 또래 남자의 모습. 온몸의 빈 공간을 두터운 천으로 채웠기 때문인지 괜한 적개심이 들 정도로 우람해 보였다. 문 열림 버튼을 누른 뒤 얼른 츄리닝 바지를 주워 입었다. '아무리 남자끼리여도 속옷 차림은 좀 예의가 아닌 것 같다'


 5분쯤 기다렸으나 초인종이 울리지 않았다. 20층짜리 아파트에 우리 집은 다름 아닌 4층이다. '하필이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엘리베이터가 고층 언저리에 있었던 것인가' 그 순간 문밖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얼른 나가 문을 열었다. 포장 된 닭 한 마리와 300ml 탄산음료가 포장된 들어올 정도의 너비로. '현금으로 해도 되죠?' 순간의 정적. 문틈으로 무엇인가가 들어왔어야 할 충분한 시간. 예상보다 긴 애매함에 이상한 기분이 들어 정면을 응시하니, 6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노신사가 뒷짐을 지은 체 옅은 미소를 짓고 서 있었다.


 그를 따라 나도 살짝 미소를 띠었다. 왜 아무런 제스처가 없냐는 의미를 담은 표정 연기. 나의 치킨은 어딨느냐는 무언의 압박. '요즘 노인분들이 아르바이트로 배달을 많이 하신다고 하던데 좀 전에 내가 잘못 봤나 보구나. 확실히 느리네. 왜 이렇게 답답하냐...' 정황상 이런 의식의 흐름에 도달한 데에 명분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 참 황당한 생각이다. 저 치는 카메라 속 남자를 뒤덮은 오리털 파카도 입고 있지 않았고 헬멧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게다가 덩치도 훨씬 왜소해 보였다. '아 여기가...' 그의 첫마디를 듣는 순간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몇 호 오신 거예요?' 나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등 뒤에 있던 왼손을 뻗어 내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현관문을 열어져쳤고 거의 동시에 구둣발로 내 복부를 밀 듯이 걷어찼다. 몸 어디에도 힘을 주고 있지 않던 나는 거의 집안까지 밀려났는데 숨을 캑캑거리며 앞을 보니 그의 반대편 손에 들린 뾰족한 송곳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로 된 손잡이 내 인생 가장 긴 길이의 송곳. 괴성을 질렀다. 실제 그 소리가 배출되었는지 여부는 알 수가 없다. 어쩌면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이성보다 빠르게 반응한 건 나의 충성스러운 하체.


2미터 남짓의 거리에 있는 안방으로 냅다 뛰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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