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의 영감
김도미 작가님는 성폭력 경험자들을 조력하면서 자신의 아픔을 겪어내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암의 재발과 안 재발 사이에 놓이게 되니 자연스럽게 욕망의 가지치기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내가 유가족 자조모임을 통해 배운 것, 도움받은 부분을 떠올리게 했고, 나는 내 욕망의 가지치기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생각하게 했다.
메이 작가님은 통증과 아픔을 언어화하는 일이 가능한가? 의문을 품고 표현이 가능할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했다고 했다. 고립된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 위해 창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을 해주셨다. 올해 메이 작가님이 번역하신 책을 찾아 읽으려 했던 시간이 떠올라 작가님의 말이 유독 가슴이 와닿았다.
김도미 작기님과 메이 작가님 두 분 모두 아프면서 엄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엄마란 가장 가까이에서 아픈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면서도 혀로 가장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라고 표현하셨다. 이야기를 들으며 내 질병 서사에서는 엄마가 등장할 수 없음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좋고나쁨을 꼭 구분해야 하는 건지 생각하게 했다.
안희제 작가님은 불완전한 존재, 아픔이 끝날 것 같지 않은 존재, 무기력이 기본값인 존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많이 생각했다고 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항상 생각했다. 한때는 정상 범주에 들어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정상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라고 해도 비정상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작가님은 가볍고 덤덤하게 이야기했지만 그 깨달음의 시간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올해 이모할머니는 아파트에서 자연 가까이로 이사하셨다. 나는 이모할머니의 새집에 여름과 겨울 두 번 방문했다. 할머니의 텃밭에는 오이, 고추, 배추, 토마토, 대파, 옥수수, 깻잎 등이 자라고 있었고, 체리, 앵두, 포도나무와 그 외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들이 밭을 에워싸고 있었다. 밭 한쪽에는 칠면조, 닭, 토끼, 강아지가 살고 있다. 여러 시도와 실패를 거쳐 야채를 기르고 동물을 키우는 할머니만의 방식을 터득해가는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재미있었다. 할머니께서는 달라진 환경 중에서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서 바라보는 산세의 풍경과 주변이 고요해지는 저녁 시간이 가장 좋다고 하셨다.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생활 환경을 맞이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유독 편안해 보였다.
헤어질 때 할머니께서는 나를 세게 껴안아 주시면서 “무조건 건강해야 한다.”라고 작게 말씀해 주셨다. '무조건'이라고 표현한 할머니의 화통함이 내 엄마의 성격과 닮았기 때문일까. 자연의 기운을 담아 할머니의 품이 모든 것을 안아주듯 더 넓고 따뜻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마음이 울컥하여 차마 할머니도 건강하시라는 말을 끝까지 다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할머니의 말을 여러 번 되뇌었다. ‘무조건 건강하자. 나는 무조건 건강할 것이다.’
올해 11월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자조모임 겸 북토크를 진행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웬만해서는 가보지 않을 것 같은 도시.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도 유가족들. 책을 낸 이유만으로 내가 만나게 될, 나와 공유할 지점이 있는 사람들이다.
영동군 모임은 지금까지 참여했던 모임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참석하신 유가족들의 평균 나이가 60대는 넘어 보였다. 참석한 분들의 나이대를 보니 직관적으로 준비한 발표와는 다르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념이나 현상에 대한 내용보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 위주로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발표 화면과 내 이야기를 집중하는 몇몇 사람들. 관련 내용을 보고 듣는 것만으로 괴로운 것인지, 내 이야기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고개를 숙인 몇몇 사람들. 중간에 여러 번 울리던 핸드폰 소리. 배차 간격이 긴 지역이라 발표 중간에 먼저 귀가한다고 일어나는 사람.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대상을 만났고, 발표 상황은 어수선했다. 참여자들의 표정을 보니 내 이야기가 잘 전달되었는지 더 알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북토크에서는 내가 그동안 어떻게 어려움을 견뎌냈고, 그 이야기를 통해 작은 도움이나 위로를 얻고자 참석한 유가족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 모임의 참석자들은 인생의 후반부를 향해 가는 나이에 있었고, 그만큼 이미 인생의 여러 풍파를 거쳐 견뎌온 자신만의 삶의 태도나 철학이 정립되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은 애도 과정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을 취할 것이고, 참고할 만한 다른 유가족의 사례를 적용해 보려는 의지가 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석하신 유가족의 상당수가 자식을 사별한 어머니의 입장인지라 그저 내 존재 자체를 마치 자식 바라보듯 대해주셨다. 발표 시작한 순간부터 계속 잘 하고 있다는 응원의 눈빛, ‘내 자식이 살아있었다면 발표자인 나처럼 이런저런 경험을 더 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안타까움과 한탄의 눈빛, 자신의 자식과 비슷한 또래인 모든 청년을 보면 아이가 생각난다는 그리움의 눈빛. 눈빛들이 보내는 메시지의 힘이 너무 강했고, 나는 그것을 그대로 목도하면서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자식이 세상을 떠난 걸 운명이라고 말하는 유가족,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그저 밭으로 나가 밭일에 몰두한다는 유가족, 말을 꺼내지 않고 눈물만 훔치는 유가족. 내가 위로를 드리러 간 자리에서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아오는 경우가 많다. 영동군 모임은 발표 진행 면에서 집중하기 어려웠고, 소중한 사람이 떠난 일과 자신의 감정에 대해 나눈 이야기가 적었지만 그동안의 자조모임과는 달리 묘한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전화 통화를 하고 버스의 배차간격을 확인하며 밭일을 생각하는 등 의도치 않게 자신의 일상생활을 마구 드러내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계속 흔들리고 또 흔들리겠지만 그들에게는 일상이 있구나. 그 일상으로 인해 계속 살아갈 수 있구나.’라는 안도감이었던 것 같다.
하남위례강변길은 올해 4월 하남나무고아원에 가면서 처음 알게 된 곳이다. 그때부터 1~2주에 한 번씩은 가서 산책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이 장소를 알게 된 건 홍상수 감독의 영화 <소설가의 영화>였다. 영화의 촬영지가 하남나무고아원이라는 것, 이곳이 집 근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가 본 나무고아원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그 옆으로 이어진 산책로가 의외로 좋았다. 강과 산을 동시에 바라보며 산책할 수 있어서 이후로 걷고 싶을 때마다 계속 찾게 되었다.
나는 왜 이 장소에 끌렸을지 생각해 본다. 영화 <소설가의 영화>의 주요 인물인 소설가가 소설 쓰기를 멈춘 상황을 그리고 있어서일까. 그런 인물이 산책하는 곳이라 마음이 쓰였을까. 흑백 화면으로 촬영된 산책 장면이 과도한 빛의 노출 때문에 마치 사라지는 것 같아서였을까. 이 장소는 왜 나무고아원일까. 내 눈에는 고아인 나무가 한 그루도 없는 듯한데, 나무에도 부모가 있나. 나무는 고아일 수 있을까. 나는 이 장소가 궁금했고, 고아원이라는 명칭이 마음에 꽂혔다.
하남나무고아원은 도시개발사업으로 버려질 나무들을 옮겨 심고 가꾸어서 새롭게 태어나는 목적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식물원이나 수목원처럼 큰 규모는 아니지만 여러 종류의 나무에 둘러싸여서 천천히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사라질 운명의 가로수나 은행나무가 모여서 산책로가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 사이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묘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쩌면 나는 이곳을 찾아가서 아픔과 상처 속에서도 다시 생장하는 나무의 힘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땅에 단단히 뿌리내려 다시금 날씨와 계절과 호흡하며 살아가는 나무처럼 나도 내 몸과 내 마음에게 힘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고아로 버려질 뻔한 존재에게도 품어주는 공간이 있다는 것. 고아는 더 이상 고아가 아니게 된다는 것. 영화 속 인물이 소설 쓰기를 멈췄지만 다른 매체로 창작을 다시 꿈꿀 수 있다는 것이 나를 이 장소로 이끌었던 것은 아닐까. 영화 속 흑백 장면은 과거인지 상상인지 꿈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흑백 화면이 컬러가 되는 장면에서는 영화 속 영화,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듯했다. 영화가 주는 이미지는 마치 내가 몸에 질병을 얻고 느꼈던 감각과 비슷했기에 영화가 나에게 더 와닿았던 것 같다.
하남위례강변길을 걸으며 나는 나무와 길과 한강 그리고 산을 바라본다. 한 발자국을 온전히 딛고 온전히 느끼려 한다. 바람을 느끼고 고아, 고아가 되는 존재를 생각한다. 나무와 강 그리고 산이 품어주는 존재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