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밭에 서 있던 줄 몰랐다

당연하던 것이 사라진 뒤에야 보인 것들

by 빼어난 별

2025년 12월 한 달간,

나는 가족과, 때로는 지인들과 어수선한 시간을 보냈다.

한 해를 정리한다기보다 그저 흘려보내는 쪽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숨 가쁘게 달려온 해였다.

행복했고, 성장했고, 많은 것을 이루며 쉼 없이 움직였다.

그러다 보니 사사로운 생각이나 잡념이 끼어들 틈 없이

앞만 보고 지내왔던 것 같다.

그래서 더 방심했는지도 모른다.


12월 초, 별다른 예고도 없이

나는 하루아침에 백수가 되었다.


2016년부터 이어온 분석 일은 원래 그런 세계다.

사람은 언제든 대체 가능하고, 성과는 늘 현재형으로만 평가된다.

실력만으로는 부족하고 촉과 운, 타이밍까지 겹쳐야 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나는 오래 버텼다.

10년 동안, 매년 결과를 만들며 그 자리를 지켜왔다.

올해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곳들이 잠잠할 때에도 내 이름으로 결과는 이어졌다.


떠났던 업체가 다시 돌아와

곧바로 성과를 만들고,


또 떠났다.

늘 그래왔듯.


그러다 5개월의 정체기.

나는 소리 없이 교체됐다. 녹슨 나사 하나가 빠져나가듯.

이 업계의 생리를 모르는 건 아니다.

잠시 멈추면 바로 바뀌는 구조라는 것도.


그럼에도 이번은 이상하리만큼 자존심이 상했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감정은 고집을 부렸다.

괜찮은 척하다가 문득 화가 나고, 서러워지고,

이유 없이 눈물이 났다.

혼자 웃다가, 혼자 가라앉았다.


그날, 신랑과 술 한 잔을 하며 말했다.

"알고 있는데도 왜 이렇게 마음이 흔들리는지 모르겠어."


신랑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괜찮아. 아마 더 좋은 일들이 오려나 보지."


나는 다시 말했다.

"욕심이 많아진 걸까. 이 감정이 뭔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때 신랑이 조용히 덧붙였다.

"난 늘 그런 마음이야. 근데 난 그만두고 싶어도 못 그만둬."


그 말이 천천히, 깊게 내려앉았다.


나는 비교적 안전한 자리에서 내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왔다.

꽃밭 같은 일상 안에서 '그깟 자존심'이 상했다고

혼자 투덜대고 있었던 셈이다.


신랑은 갑과 을 사이를 오가며,

사장과 직원들 사이에서 수없이 감정을 삼키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 사실을 조금 늦게, 그리고 아주 깊게 와닿았다.


속상함은 미안함으로 바뀌었고,

미안함은 감사함으로 번져갔다.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데

감정이 조용히 차오라 눈가에 머물렀다.


며칠이 지나자 요란하던 마음은 잦아들었다.

남은 건 고요한 감사였다.


이 일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걸 나는 안다.

늘 그래왔으니까.

운과 촉은 언제나 나를 다시 데려왔다.


그러다 아이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엄마 아빠에게 서운한 거 없어?"


큰 아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딱히 없는 것 같아. 결핍이 없어서 그런가 봐. 그래서 그냥 감사해."


그 말이 오래 남았다.

기특하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고,

그다음에야 문득 이런 질문이 따라왔다.


결핍이 없는 삶은 정말 좋은 걸까.

부족함이 있어야 사람은 비로소 움직인다.

원하고, 갈망하고, 조금 더 멀리 가려 애쓴다.


내가 돈 공부를 시작한 것도 그런 부족함 때문이었다.

그 결핍이 나를 행동하게 했고,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아이들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하게 키운다고 믿어왔지만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채워주고 있었다.

이제는 아이들 마음에

조금의 여백을 남겨두고 싶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늘 하던 일이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 믿었다.

성과는 있었지만 그 안에는 긴장도, 결핍도 없었다.


지금의 이 시간은 무언가를 잃었다기보다

잠시 비워진 것처럼 느껴진다.


나는 결핍을 늘 부정적으로만 바라봤다.

하지만 깊은 어둠으로 빠지지만 않는다면

결핍은 사람을 앞으로 밀어주는 힘이 된다.

성장을 향해 조용히 켜지는 신호처럼.


지금 나는 백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삶은 더 분주해졌다.


아직은 모르지만,

늘 그랬듯

다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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