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을 겸손이라 불렀다

by 빼어난 별

나는 행동을 시작했고, 삶은 분명 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변화 앞에서 나는 여전히 나를 낮추고 있었다. 더 잘해보고 싶어 질수록, 더 작아졌다. 그 감정을 나는 겸손이라고 불렀다.


겸손보다 차라리 자만심이 낫다고 생각하게 된 건, 내가 충분히 겸손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오래 나를 의심하며 채찍질해 왔다는 걸 알게 된 이후였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번 해본 사람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한 번도 제대로 시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였다.


저녁 준비를 하며 유튜브를 틀어두고 있었다. 그때 "아..." 하고 탄식이 터져 나왔다. 불안이나 우울, 걱정 같은 감정은 현재 일어난 일이 아니라, 내가 미리 만들어낸 '준비된 감정'이라는 말이 귀에 박혔다. 즉흥적인 감정이 아니라 이미 여러 번 상상하고, 걱정하고,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린 끝에 만들어진 결과라는 것.


생각해 보니 나는 늘 그렇게 해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미리 상상하고, 그 상상의 끝에서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감정에 눌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멈춰 서곤 했다.


숫자 앞에서도 그랬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암산을 잘 못했다. 어느 순간 그냥 포기해 버렸다. "난 계산은 안 돼." 그렇게 스스로 선을 그어놓고는 그 영역을 피해 다녔다. 계산기를 찾는 게 더 편했고, 굳이 애써보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설득해 왔다.


남편이 가끔 말한다. "이것도 계산 못 해?" "이 정도는 알고 있어야지." 말 자체에는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나도 인정하는 부분이니까. 그래, 나는 계산에 약하다. 그 정도다. 그런데 가끔은 말이 아니라 표정이 먼저 들어온다. 무심하게 스치는 눈빛, 툭 던지는 어조 속에서 나도 모르게 의미를 붙인다. '지금 나를 무시한 건가?' 그 순간 이유 없이 화가 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정말 무시했을까. 아니면 내가 이미 스스로 인정해 버린 약점이라 그 말에 '비아냥'이라는 해석을 덧붙인 건 아닐까.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그냥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미 그 부분에서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열이 났다. 상대가 나를 깎아내려서라기보다, 내가 이미 나를 깎아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제야 그 말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감정은 준비된다는 말. 자꾸 듣는 내 안의 말들이 결국 내가 되어버린다.

"난 할 수 없어."

"내가 문제야."

"나에겐 어려운 부분이야."

"난 안 될 거야."


이 말들은 누가 내게 한 말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걸어온 주문이었다. 행동해 보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실패를 상상하고,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키워가며 감정을 만들어냈다. 타인이 아니라, 내가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려면 그 준비 과정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마음을 바꾸는 건 어렵다. 그래서 몸을 먼저 움직이는 게 빠르다고. 운동을 하고 나면 잡생각이 줄어드는 경험을 우리는 안다. 몸이 움직이면 상상의 시간은 줄어든다. 머릿속에서 괜히 키워내던 시뮬레이션도 힘을 잃는다.


나는 감정을 바꿀 수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루를 다시 설계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뇌는 익숙한 시간 속에서 조금씩 새로운 작은 행동을 넣어야 변한다. 그래야 내 감정이 어떤지 살펴볼 여유도 생긴다.


《렛뎀 이론 》에서는 감정 또한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행동이 나를 화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상황을 무례하다고 해석하거나 무시당했다고 느끼거나, 내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 난다는 것. 상대의 행동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인데, 그걸 통제하려 할수록 오히려 스스로 덫에 걸린다.


그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내버려 두기'와 '내가 하기'였다.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붙잡으려 할수록 부정적인 감정의 씨앗은 커진다. 내버려 두자는 말은 잊어버리라는 말과 다르다. 잊어버리는 건 잃어버린 느낌에 가깝지만, 내버려 두는 건 힘을 빼는 태도에 가깝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받아들이는 것. 나 자신을 스스로 자유롭게 하는 방식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두고,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에 힘을 쓰며, 주도권을 내 쪽으로 되돌린다.


요즘 나는 마인드를 돌아보고 있다. 나 역시 별것 아닌 일에 흔들렸다. 내 가까운 소중한 사람이 감정 속에서 소용돌이치며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타인을 지키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당신은 돌보지 못한 채 방황하는 모습. 그걸 지켜보는 이들만 더 속상해지는 순간들.


걱정은 걱정을 낳는다.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다 보면, 부정적인 마음은 현실처럼 굳어진다. 나 또한 늘 쿨한 척을 해왔다. "난 신경 안 써." "남들이 뭐라 하든 나만 아니면 돼." 그런데 애정을 준 사람들 앞에서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결국 감정적으로 다가간다.


그러다 문득 멈춘다. 나 또한 상대를 통제하려는 마음이 있었던 건 아닐까. 어쩌면 상대의 말이 아니라, 그 말에 붙인 나의 의미가 나를 흔들고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은 생각을 부르고, 해석은 또 다른 해석을 낳는다. 그 끝에서 감정은 점점 사실처럼 굳어진다.


사실 나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촉이라고 해야 할까. 딱히 설명은 못 하겠지만, 그냥 느낌으로 감지한다. "뭔가 이상한데?" 하는 그 기분. 정확히 짚어내지는 못해도 공기가 달라졌다는 건 느낀다. 그런데 그걸 굳이 말로 꺼내지 않는다. 긴가민가한 일이 많고, 괜히 내가 예민한 사람처럼 보일까 싶어서 모른 척할 때가 많다. 그러면서도 속에서는 이미 해석이 시작된다. 문제는 그 감이 아니라, 그 감에 내가 덧붙이는 이야기였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것에 예민한 건 아니다. 관심 있는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캐치한다. 흐름을 읽고, 작은 변화도 잘 알아챈다. 그런데 관심이 가지 않는 분야에서는 둔해도 너무 둔하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엉뚱하다는 말을 듣고, 허당 같다는 소리를 듣고, 가끔은 사차원 같다는 말도 듣는다. 남편은 종종 묻는다. "너 정말 몰랐어? 진짜 몰랐던 거야?" 그 말속에 장난이 섞여 있다는 걸 알면서도, 예전에는 괜히 발끈했다. '내가 그렇게까지 모자라 보이나?' 하고 속으로 반응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모든 걸 세세하게 챙기지 않는다고 해서 모자란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내가 에너지를 쓰는 영역과 흘려보내는 영역이 다를 뿐이다. 관심이 닿는 곳에서는 선명하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힘을 빼는 사람일 뿐이다.


감정은 준비된다고 했다. 어쩌면 나는 남의 말에 빠르게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 해석을 빠르게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말을 들으면 바로 의미를 붙이지 않겠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잠시 멈추겠다. 모든 걸 읽어내려 하지 않겠다.


그리고 하나를 더 선택한다. 이제는 나를 낮추는 해석을 믿지 않겠다. 그럴듯한 겸손이라는 말 뒤에 숨지 않겠다. 확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멈춰 서 있지 않겠다. 조금은 뻔뻔해 보이더라도 움직이는 쪽을 택하겠다.


감정이 준비된다고 했다면, 나는 이제 나를 지지하는 감정을 준비하겠다. 의심보다 믿음을 먼저 세우고, 실패보다 시도를 먼저 떠올리겠다. 멈추는 사람이 아니라, 움직이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재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끝내 시도하는 사람으로.


나에게 독서는 그 연습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간이다.

독서는 내 안을 다시 고요하게 만드는 시간.

마음의 여유를 되찾기 위한 조용한 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