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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돌이 Jul 01. 2015

그대, 외로운가.

고등학교 2학년 아이들의 마음을 엿보다

단절되는 우리를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몇 년 전 아이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던 수업 때문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방학을 며칠 앞둔, 교사에게도 학생에게도 가장 수업하기 싫은 날에 나는 아이들에게 시를 써보게 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기형도의 '빈 집'을 수업할 때 옛 연애사까지 들춰내며 열변을 토했던 탓에 아이들이 조금이나마 '시'에 흥미가 남아있을 때였다. 학습활동에는 세 가지 사진이 제시되어 있었다. 장애인 표지판, 얼음판 위의 북극곰, 그리고 지하통로의 노숙자. 이 사진들 중에 하나를 골라 느낀 점을 시로 표현해보는 것이었는데 언제나처럼, 떠들거나 자거나 쓸데없는 장난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이런 와중에도 교사의 말을 착실히 따르는  몇몇 아이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슬쩍 그 아이에게 다가가 그 녀석이 쓴 시를 크게 낭독했다.

제목 : 아마도

지금 하는 것 보면 아마도

내 점수 보면 아마도


나는 짐짓 정색을 한 채 수업시간에 하듯 그 아이의 시를 해설해나가기 시작했다.


이 시는 노숙자 사진을 보고 쓴 것입니다. '아마도'라는 말에는 추측의 의미가 있지요. 시적 화자는 현재 자신의 삶에 대한 치열한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불안을 드러내 보입니다. (떠들던 아이들이 잠잠해지더니 이윽고 키득거리는 녀석들 등장. 그 덕에 자는 아이들도 일어남.) 특히 매 행의 끝에 '아마도'를 반복하여 그 불안의 정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매력은 '여운'입니다. 아마도 뒤에 이어질 화자의 이야기를 독자들은 화자의 마음을 헤아리며 자신의 삶에 비추어 보기도 할 겁니다. 하지만 '~라면'이라는 가정법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화자는 단순히 현실에 좌절만 하고 있을 것 같지 않네요. 여기에는 '그렇지 않다면', 내가 지금과 달리 살아간다면 다른 미래가 올 수도 있다는 막연한 희망도 함께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점수'라는 데에서 우리는 진한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맞아, 맞아, 내  점수도!"라는 소리가 여기 저기서 들림) 독자들 중에는 심하게 감정이입을 하는 사람들도 벌써 나타났네요. 삶의 방향이 한낱 점수로 매겨지는 현실에 대한 진한 아픔을 전달하는 객관적 상관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면 정말 잘 쓴 거야! 와아, 진짜 완전 깜놀! 자, 다들 박수!!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쏟아졌고, 그 아이는 꽤 부끄러워했다. 물론 저 해설은 말도 안되지만, 중요한 건 '시는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고, 그 아이의 정서는 너무나도 잘 전달되고 있었다. 아이들이 저 골 때리는 해설에 흥미를 느껴서일까. 서서히 진지하게 시 창작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대부분 완성했을 때 한 명씩 시를 읽어주었고, 그 와중에 잘 쓴 것들은 모아서 다른 반에 자랑하겠다며 사진까지 찍기 시작했다. 그 때 아이들의 시를 통해 나는 참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구차한 내 말보다 아이들의 시를 직접 보고, 지금 이 나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란다.


터널


터덜터덜 터널을 지나가고 있다

아무도 없이 혼자 걷고 있지만

발소리는 둘이다

나는 혼자지만

발은 둘이다



(아이들은 연애를 못해 저런다며 마구 웃었다. 나는 우린 누구나 외롭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외로운 법이라고 눙쳤다)



그리움


혼자 보는 이 거리

너무 외롭다

외롭다는 것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것

그립다...


(북극곰 사진을 보며, 환경을 이야기한 아이들이 많았는데 이 녀석은 이렇게 썼다. 얼마 전에 여친과 헤어졌다고, 아이들이 말해줬다)


노숙자


새벽 밤 야자하고

집 가다 들린 지하철역

냄새나던 노숙자 아저씨

맨날 있던 그 자리 텅 비어 있어

남 모르게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 왔다



(평소에도 따뜻한 마음씨를 보여주던 여학생. 마지막 두 행은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아이들도 박수를 많이 쳐주었다.)



눈에 보이는 계단 몇 개가

사람들 지갑에 층층이 돈처럼 어렵다

겁을 먹어버렸다

오르지 못할 것만 같다



(늘 조용하고 자신 없어하던 아이. 마음이 조금 시렸다. 경제적 문제로 남 몰래 아팠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아이들도 조금 숙연해졌다.)





"세계 최고의 베이스리스트가 될 거야"


오늘도 추위와 굶주림에 잠에서 깬다

춥고 배고프고 씻고 싶다

아아, 그때 친구들 말만 들었어도

아아, 그때 고집 부리지 않았으면...

이러지 않을 텐데 이러지 않을 텐데

오늘따라 유난히 순대국밥이 먹고 싶다.



(베이스리스트가 아니라 베이시스트라 고쳐주자 아이들이 격하게 웃어댔다. 장래희망이 베이시스트인 아이. 물론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다. 늘 장난치고, 자고, 떠들던 녀석인데 고민이 많다는 걸 알았다)




길거리


길거리에서 수레를 끌던 할아버지는

이젠 없다

길거리에서 귤을 팔던 할머니는

이젠 없다

빨라진 세상 속에

나아진 세상 속에

혼자 살아간다, 우리는


(마지막 행이 의미심장했다)


아빠 어디 가?


집을 이사 간다

그들이 또 이사 간다

또 이사 간다

이젠 갈 데가 없다

아빠 우리 이제 어디가...?


(동명의 티브이 프로그램이 한창 인기 있을 때라 아이들이 마구 웃었다. 본인은 억지로 썼다고 했지만, 집 잃은 어린 북극곰의 마음을 절절히 표현하여 현대인의 환경 파괴에 경종을 울리는 작품.이라고 평했더니 녀석은 피식 웃었다.)


노숙자


어릴 때 꿈이 많았던 아이

그 꿈을 위해 달리던 아이

세월이 흘러가며

고등학생이 된 아이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뤄질 수 없었던 꿈

그 아이 노숙자가 되었네


(아이들은 웃었지만, 가장 많은 아이들이 '노숙자' 사진을 골랐고, 자신의 미래를 투영하고 있었다)



기다림


온순한 곰 한 마리가

다 녹은 빙하 위에 서 있다

누굴 기다리고 있을까

다 녹은 얼음을 회상할까

나는 항상 기다린다

공처럼 투명한 눈을 가지고

나의 여자를 기다린다



(아이들도, 나도, 한참을 웃었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장원으로 꼽힌 작품을 소개한다. 외모도 뛰어나지 않은 데다가 성적은 거의 전과목 꼴등이었고, 늘 말썽의 중심에 서 있는 남학생이었다. 내가 처음 읽었을 때 깜짝 놀랐고, 아이들에게 누가 썼는지 말해주지 않은 채 읽어주었다. 아이들은 감탄의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가 썼는지 알려주자 교실은 함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특별히 그 아이의 작품은 따로 프레젠테이션 파일로 만들어서 내가 수업 들어가는 반마다 보여주었다. 누가 썼냐고 했을 때, 내 대답을 들은 아이들은 그야말로 자지러졌다. 모두의 만장일치로 이 작품이 장원으로 뽑혔고 나는 매점에서 빵과 음료수를 상품으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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