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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pr 22. 2024

인도에서 온 그녀

다시 이어진 수로왕비릉과 구지봉


이 여행은 동선으로 보면 상당히 비능률적이다. 그리 크지 않은 도시인 데다 알만한 명소들 몇 개는 조금 무리한다면 하루에 해치울 수도 있을 만큼 가까이 있지만 나는 하루에 한 장소만 간다. 예를 들면 김해국립 박물관에서 뒷산으로 올라가면 구지봉과 연결되고 그도 아니면 정문을 나와 큰길을 따라 나무 그늘이 운치 있는 좁은 인도를 걸어 뒤쪽으로 가면 구지봉과 수로왕비릉으로 바로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박물관에 간 날은 전시장 안에서 보낸 시간만으로도 꽉 찬 하루가 되어서 바로 숙소로 돌아오고 일주일쯤 후에 수로왕비릉으로 갔다.


여행은 관광과 다르다. 더구나 일상에서 잠깐 멈춘 시간이 필요해서 시작한 여행이 아니던가. 나는 시간이 많았고 체력은 부실했고 의욕은 평범했다. 특정한 목적지는 일종의 의무감이었고, 혼자 낯선 노선의 버스를 타고 무지막지하게 걷는 것이 여행의 목적이라 착각할 때도 있었고 그건 어느 만큼 사실이기도 했다. 그리고 대충 끼니를 때우듯 먹다가 모처럼 새롭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난 후의 포만감이 즐거웠고 무엇보다 잠이 달았다. 평소에 잠과 그리 친하게 지내지 못했던 나는, 달고 깊은 잠이 이 여행이 내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란 생각을 한 아침도 있었다.



사적 제74호인 '김해 수로왕비릉'은 분산에서 구지봉으로 내려오는 구릉에 위치해 있으며,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무덤이다.


김수로가 왕위에 오른 지 4년(서기 48년)이 되었을 때, 가락의 구간들이 자신들의 딸들과 혼인을 요청하자 왕은 하늘이 내린 왕후가 있다면서 양산도로 신하를 보내 누군지도 모를 그녀를 기다리게 한다. 마침내 붉은 돛을 단 배가 도착하고 거기서 내린 한 여인이 자신은 '아유타국'의 공주이며 부모님이 딸을 수로왕의 배필로 보내라는 계시를 받아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여인이 바로 허황옥이다.


그녀는 인도인이었고 나이도 수로왕보다 9살이나 많았다. 조선시대 배경의 사극에서 본 왕비 간택의 과정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왕비가 될 사람이 연상인 데다 인도인이었다는 것이 평범하게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다문화 민족이고, 연상연하 커플도 많았다. 그런데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걸 강조했는지 모르겠다. 단일민족을 강조하는 밑바탕엔 인종차별이 깔려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사실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고구려 유리왕의 부인도 중국인이었고, 고려 왕들도 몽골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단일민족이라 우긴 이유는, 남성 중심의 사회가 지속되다 보니 여자는 어느 나라 사람이든 상관없이 남자만 한국인이면 단일민족의 혈통이 유지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닐까? 이젠 삐뚤어진 우월성을 가진 단일민족이란 단어가  언급할 가치도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게 마음에 든다. 위 아 더 월드.



왕과 왕비의 무덤을 가까이 두는 일반적인 예와는 달리 수로왕비릉은 수로왕릉과 직선으로 쳐도 1km나 떨어져 있다. 또한 수로왕릉이 평지에 있는 것에 비해 수로왕비릉은 높은 구릉 위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수로왕릉이 있는 곳이 평온하고 아늑해서 더 좋은 자리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인 풍수지리에서의 명당은 햇볕이 잘 들고 사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이라 알고 있기에 두 릉의 위치는 각각 떨어져 있다는 것보다 더 궁금증을 일게 했다. 더구나 이 자리는 수로왕의 탄생설화가 시작된 장소인 구지봉과 연결되어 있어서 더욱 수로왕이 아닌 왕비의 묏자리가 된 데는 뭔가 내력이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왕과 왕비의 릉이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들이 있다고 한다. 고향인 인도를 그리는 마음을 달래주려고 조금이라도 더 멀리 보이는 높은 곳에 위치했다고도 하고, 허황후의 세력이 막강해서 왕릉과 비슷한 크기와 높은 위치의 릉을 만들었다고 하고... 등등. 그중 하나가, 이곳은 햇볕이 잘 들고 풍수지리학적으로 좋은 자리여서 원래는 왕릉의 자리로 점찍어 둔 곳인데 허황후가 먼저 세상을 떠나자 수로왕이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서 최고의 명당을 양보했다는 것이다. 모든 게 추측이니 마지막 이유를 믿기로 한다. 어쩌면 흔하고 식상해서 진심을 곡해하기도 쉬운 말이 '사랑하기 때문에..'가 된 세상이지만 그래도 언제까지나 변하지 않는 인간의 화두는 '사랑'이 아니던가.


수로왕비릉

금슬 좋은 수로왕과 왕비 허황옥의 사이에서는 열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수로왕은 그중 첫째에게는 '김해 김 씨'를 둘째와 셋째에게는 '김해 허 씨'를 주었다. 수로왕이 허황옥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나머지 아들들은 모두 출가했다고 한다. 수로왕과 허황후가 만난 이야기는 국립김해박물관 앞 '가야의 길'에 있는 '가락국기'에 '수로왕과 허황후의 결혼 기사'라는 제목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락국기@가야의 길


수로왕비릉에서 계단을 내려오다 보면 왼쪽에 파사석탑이 있다. 경남 문화재 자료 227호인 파사석탑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허황옥이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오다가 풍랑을 만나 다시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아버지가 이 돌이 풍랑을 가라앉힐 거라며 실어주었고 덕분인지 그녀는 무사히 가야에 도착했다. 파사석은 무늬가 특이하고 붉은빛이 도는, 우리나라에는 없는 돌이라고 한다. 실제로 실험을 통해 닭 볏의 피를 떨구어도 굳지 않는다고 걸 입증해서 신비로움을 더한 돌이기도 하다. 풍랑을 잠재웠다고 해서 진풍탑으로도 불린다.



능에 딸린 부족 건물로는 제를 지내는 '숭보재'와 '외삼문, 내삼문, 홍살문'등이 있는데 마당 안으로 들어가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었지만 마침 주변 정비를 하시는 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계셔서 방해할까 봐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오솔길처럼 구부러진 저 길은 수로왕비릉 바로 앞에서 구지봉으로 넘어가는 샛길이다. 구지봉은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원래 수로왕비릉은 거북의 몸통에 해당하고 구지봉은 머리에 해당하는 형상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때 구지봉의 수맥을 끊어놓으려고 거북의 목 부분에 해당하는 곳에 길을 냈다고 한다. 나중에 길 위에 다리를 놓듯 땅을 다시 이어 그 아래의 길은 터널처럼 되어 '구지 터널'이라고 부르는데 이 터널 바로 위에 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의 경계가 되는 구지문이 있다.



구지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수로왕비릉 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다. 무심코 바라본 풍경인데 소나무들 사이로 언뜻 비치는 왕비릉이 빗속에서도 아름다웠다. 이때는 미처 몰랐었다. 저 담장 아래에 수맥을 끊기 위해 만든 도로가 있고 그것을 다시 복원하기 위해 터널을 만들었다는 것을.



길을 내기 위해 터널을 뚫은 게 아니라 이미 나있는 도로 위에 양쪽을 잇기 위해 만든 구지터널, 이렇게 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끊어져 있던 수로왕비릉과 구지봉은 다시 연결되었다.



구지봉에 올라가면 당시의 통치계급이었던 구간들과 백성들이 모여서 어진 왕을 보내달라고 기원하는 구지가를 부르며 춤을 추었더니 하늘에서 여섯 개의 알이 내려와 그 알에서 태어난 여섯 명의 아이가 각각 여섯 가야의 시조가 되었다는 전설의 터가 있다. 그리고 기원전 4~5세기경, 청동기 시대의 지도자 무덤인 남방식 고인돌도 있다. 이 고인돌의 석상에는 '구지봉석'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당대의 명필이었던 한석봉의 글씨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이곳을 신성한 장소로 여겼다는 걸 짐작하게 한다.


태풍이 막 지나간 후라 아직 비가 많이 왔다. 우산을 쓰고도 옷이 젖었고, 흙길은 미끄러웠으며, 숲은 어두웠다. 재현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를 설화의 현장으로 가는 길 치고는 다소 험한 날씨여서 잠깐 후회한다. 하지만 짧지만 꽤 불편했던 길을 올라와, 쏟아지는 비를 대수롭지 않게 받아내는 잘 다져진 황토 마당 앞에 섰을 때 마음은 또 그런대로 그윽했다. 여섯 개의 알 재현지라는 동시 같은 명패에 짧은 미소를 짓다가 문득, 천천히 오래 덖은 찻잎으로 우려낸 따끈한 차 한 잔을 마시고 싶었다.


대부분의 설화는 다소 황당하고 비현실적이다. 그렇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때론 마치 증명된 역사의 한 부분인 것처럼 존중하고 보존한다. 구지봉의 전설 앞에서 그 이유를 가늠해 본다. 태생인 사람이 난생이라는 자체부터가 황당하니 구체적인 설화를 믿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런 설화를 전한 사람들의 마음이다. 현명하고 덕이 많은 왕이 나타나 태평성대를 누리게 해 주길 바랐던 그 시대 사람들의 소망이 그 후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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