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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서 Apr 26. 2024

풍경(風景) 안에 풍경(風磬) 달다.

 정호승, 풍경 달다_여의낭자와 황세장군


김해 봉황동 유적은, 우리나라 최초로 패총의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의 대표적인 생활 유적지인 봉황대를 합쳐서 지정된 곳이다. 이곳은 고인돌, 조개무지, 항구시설, 봉황토성등이 발굴되어 청동기 시대부터 가야 시대까지의 복합 유적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가야인의 생활상과 더불어 가야 왕국의 존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봉황대라는 명칭의 유래는 조선 시대에 김해 부사를 지낸 정현석이 언덕의 모양이 봉황이 날개를 편 모습과 같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전 포스팅에서 소개한 패총전시관에서 나오면 멀리 정면으로 보이는 숲이 봉황대다. 봉황대로 올라가는 좁은 흙길엔 판판한 돌이 깔려있고, 제철을 맞은 키 큰 무궁화 여러 그루가 촘촘하게 서로 기대어 꽃을 피우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동안 '여름 산책'이란 단어가 저절로 떠올랐다.


길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곳까지 오르면 오른쪽으로 너른 집터가 있는데 살림집, 창고, 해우소까지 갖추고 있어서 마치 꽤 풍족했던 어느 가야인의 집을 보는 것 같다. 재현해 놓은 것이지만 그 화려한 베르사유 궁전에도 없는 해우소까지 있다. ^^


움집

가야의 보편적인 주거지의 형태는 땅을 파고 내려가 벽채없이 지붕만 씌운 움집 형태인 수혈주거. 당시로는 가장 손쉽게 지을 수 있는 집의 형태였는데 지역의 기온 차에 따라 파 내려간 땅의 깊이가 달랐다고 한다.(대략 50cm~ 1m 사이) 기본적으로 추위를 피하기 위한 구조긴 하지만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나 실내의  환기 등 많은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움집은 이후의 모든 살림집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 살림집은 철기시대에 온돌이 생기면서 바닥의 단점을 보완하는 등, 점차적으로 세분화되고 기능성을 가춘 형태로 발달되었다. 뜬금없이, 움집을 보면서 어릴 때 외가에서 보았던 김치광이 떠올랐다.


고상가옥

주로 땅을 파고 지었던 움집 형태의 살림집에 비해 곡식등을 저장하는 창고는 짐승과 습기, 침수등을 막기 위해 지면에서 떨어져 지은 고상 가옥형태다. 주거지도 이런 형태가 더 낫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잠시 했는데 고상 가옥 형태의 살림집도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봉황대의 다른 쪽에서 알았다. 그래도 움집이 가장 보편적인 주거 양식이었던 이유는 아마 추위를 피하기가 더 수월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의 집을 기웃대며 주인이 나오길 기다리는 수상한 이방인 행색으로, 햇살이 내리쬐는 흙마당을 어슬렁거리면서도 마음은 이미 딴 데 가 있었다. 사실 봉황대에 올라서자마자 마음을 빼앗긴 풍경이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으로 내가 나무로 만든 바닷가의 '피어pier'만큼 숲 속의 돌계단을 좋아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비록 셀폰 카메라긴 하지만 여행하는 동안 꽤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가끔 아주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을 때가 있었다. 이 사진도 그중의 하나다. 나뭇잎이 걸러주는 햇살, 뭉근하게 닳은 돌계단, 숨은 듯 얼핏 보이는 낮은 기와지붕, 무심하게 지나가는 바람... 그날의 오후가 사랑스러웠던 이유가 이 사진 한 장에 모두 담겨있다. 때때로 사진은, 풍경의 지문 같다고 생각하다 이내 깨닫는다. 아무래도 '이은규' 시인의 '바람의 지문'에서 비롯된 연상작용 같아서 내 부실한 무의식을 탓한다. 그럼 다시 뭐라고 해야 할까.


사진은, 풍경을 다는 일 같다. 내 눈이 덜어낸 풍경(風景) 안에 마음의 풍경(風磬)을 매달면, 사진을 볼 때마다 무심하게 지나갔던 바람이 돌아오는 소리처럼 풍경이 흔들린다. 문득 떠오르는 정호승의 시, 풍경 달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끝에

풍경을 달고 돌아왔다.

먼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사진에서 위쪽으로 살짝 보이는 작은 기와집이 '여의각'이라는 사당이다. 여의각은 1975년에 '여의 낭자'를 기리기 위해  지어졌는데 매년 '여의제'가 열린다고 한다. 여의 낭자에 대해 말하려면 먼저, 패총전시관 옆에서 보았던 조각상부터 시작해야 한다.



하늘문이 열리고 그들의 사랑은 다시 이루어지리다. 문체에선 낡은 순진함이 묻어나지만 이를 형상화한 조각상은 꽤 현대적이다. 이 문장이 써진 벽화를 회현동 근처에서 처음 보았을 때는 '그들'이 누군지 몰랐는데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바로 이 두 사람, 여의 낭자와 황세장군이었다.


황세바위와 여의각 주변

가락국 제9대 겸재왕 때, 남대 정동에 사는 출정승과 대사동에 사는 황정승이 있었는데 이들은 자식이 태어나면 혼인을 시키기로 약조를 했다. 이후, 황정승은 아들 를 낳고 출정승은 딸 여의를 낳았지만 출정승은 마음이 변해서 아들을 낳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여의는 계속 사내아이인 척하면서도 세와 친구처럼 지내며 자랐다. 그러다 결국엔 여의가 여자라는 걸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되었고 여의의 아버지도 다시 마음을 바꾸어 혼인하기로 약속을 했지만 얼마 후 신라군이 쳐들어오자 '세'는 출정하지만 큰 공을 세우고 무사히 돌아온다 하지만 왕은 세의 공을 치하하며 하늘장수라는 장군 칭호를 주고 외동딸인 유민 공주와 혼례를 시킨다.


갑자기 파혼당한 여의 낭자는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라는 부모들의 권유를 물리치고 끝내 혼자 살다가 24세의 나이로 죽고, 이 소식을 들은 황세 또한 마음의 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자 성안 사람들은 둘의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그들이 어릴 때부터 함께 놀던 곳에 작은 바위를 얹고 서남쪽의 것은 '황세돌', 동남쪽의 것을 '여의돌'이라고 불렀다. 한편, 유민공주도 속세를 떠나 봉황대 서쪽의 임호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했다고 전하는데 그래서 임호산을 '유민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전설에서 가장 측은한 사람은 유민공주 같다.



봉황대는 중간중간 만날 수 있는 유적지가 아니더라도 둘레길 같은 산책로를 걷는 것만으로도 무척 매력적인 장소다. 나무 그늘이 드리운 숲길이라 시원해서 여름에도 걷기 좋다. 실제로 꽤 많은 분들이 가벼운 평상복 차림으로 걷고 있었다. 다른 날 다른 장소에 갔다가 봉황대가 근처인걸 알고 다시 온 덕에 이 산책길을 두 번 걸었다. 맑은 날은 나무 그림자가 시원하고 예뻐서 좋았고, 흐린 날은 또 그대로 느리게 지나가는 시간이 좋았다.


산책로의 중간쯤에 위치한 여의각을 지나 계속 내려가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낮은 도시의 모습이 보인다. 콘크리트 건물이 대부분인 도시의 풍경이 아름다운 건 그 속에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길이 끝나면 봉황대 공원이다. 공원에는 꽤 넓은 잔디밭을 가운데에 두고 빙 둘러가며 나무들이 많아서 그늘이 넉넉하다. 그늘마다 납작한 미소를 띤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벚나무가 많은 걸 보니 꽃잎 날리던 봄날엔 길도 사람도 참 고왔겠다. 공원 한 켠에서는 고상가옥이 있는 주거지의 흔적과 오래된 망루, 기마무사상 같은 것들도 볼 수 있다.


기마무사상, 국보인 '도기 기마인물형 뿔잔'과 '기마인물형 토기', 고분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을 참고하여 청동주물로 제작한 것이다. 무사뿐 아니라 말에도 철제 투구와 갑옷을 입혀 보호하고 있는 것으로 가야의 우수한 철기문화와 강력한 군사력을 나타내고, 금동제의 말장식과 섬세한 말갖춤새는 발달된 가야 문화를 상징하기도 한다..


나무 그늘 아래에 자리를 깔고 도시락을 나눠 먹거나 어깨를 기대고 앉은 사람들의 담소하는 모습이 다정하다. 문득, 내가 혼자라는 걸 깨닫자 그들 곁을 지나가는 걸음이 조금 꼬인다. 마치 스스로 현장학습 나온 의욕만 앞선 범생이처럼 혼자 기웃거리며 사진 찍고, 안내문을 읽다가 갑자기 현타가 온 것이다. 하이고.. 다 의미 없다. 나도 그만 걷고 좀 쉬자.   



마침 한적한 작은 연못이 눈에 띄었다. 나무 그림자가 짙게 스며든 검은 물 위로 수련 한 송이가 웅크렸던 꽃잎을 막 펴는 중이었다. 마주 앉아 깊은숨 한 번 내쉰다. 물결이 살짝 흔들리고 마음은 어느새 연잎 위에 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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