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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Oct 16. 2020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아직 아내와 열애 중입니다

시월의 어느 날, 행복한 한 남자의 고백

"영희 씨, 우리 잘 살고 있는 거 맞죠?"


추석 차례 준비를 하느라 지친 아내를 위해 난 조금은 선선해진 가을 날씨가 반가워 아내에게 데이트를 청했다. 명절 준비하느라 힘들었던 아내는 데이트보다는 휴식이 필요할 수도 있었지만 별 내색 없이 내 데이트 신청에 응했다. 아내는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며칠간 남은 휴일 때문인지 표정만은 여유로워 보였다.


아내와 데이트 코스는 가을꽃 향기 물씬 풍기고, 노란 물결이 넘실 거리는 황화 코스모스 꽃밭이었다. 꽃밭은 평소 야외 공영 주차장으로 사용됐던 곳이지만 과거 주차장이었음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아들의 강력 추천이 있어서 더욱 기대를 갖고 우린 그곳을 찾았다. 넓은 꽃밭 주변으로 빼곡히 들어선 높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이질감을 보였지만, 오히려 그 이질감 때문에 금빛 꽃밭 물결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아내와의 데이트가 오래간만이라 더욱 그 시간이 기분 좋고, 소중하게 여겨졌다.


주변에는 가을에 접어든 평온한 휴일을 즐기려고 찾은 연인들과 가족들이 많았다. 다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아름다운 꽃이 빼곡히 조성된 비옥한 꽃밭은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하지만 척박한 마른땅에 노란 물결을 이루며 빛내는 황하 코스모스의 자태만큼은 그곳을 찾기에 충분한 이유가 됐다. 황금빛 꽃잎이 가을 햇살에 반사되어 너무 눈이 부셨다. 아내는 이런 꽃을 연신 카메라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고, 난 그런 아내의 모습을 내 눈에 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오랜만에 아내와의 외출이라 난 조금 더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다. 우린 발걸음을 호수공원으로 돌렸고, 공원에는 명절 연휴를 집에서만 보내기 답답해하는 사람들 인파로 도심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가는 곳마다 꽃들과 선선한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우릴 맞았다. 아내와 난 청명한 가을 날씨를 만끽했다. 종종 둘 간의 사회적 거리 두기를 무시하고 손을 꼭 맞잡기도 하며 한 걸음, 한걸음 느린 걸음으로 오후 한때를 즐겼다. 터질듯한 꽃망울이 자태를 뽐내며 꼿꼿이 서있는 백일홍 무리에도 감탄하고, 화려하게 수놓은 장미 정원도 걸으며 호수공원 데이트를 톡톡히 즐겼다. 코로나만 아니었어도 아마 오늘은 밖에서 둘이 분위기 있게 술잔을 마주치고 가는 가을밤을 아쉬워하며 하루를 마무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 우리 오기를 기다릴 아이들을 생각하며 아쉽지만 첫 번째 시월의 데이트를 마무리 지었다.

알록달록, 형형색색 자태를 뽐내는 호수공원 꽃들


  시월의 첫 번째 데이트 이후 일주일이 지난 한글날 연휴 전날, 난 아내에게 두 번째 데이트를 신청했다.


 "영희 씨, 내일은 지수도 오후에 친구랑 약속 있다는데 저랑 행주산성 데이트 어때요?"

 "또요? 지난주에도 둘이 데이트했잖아요. 철수 씨도 연휴인데 조금 쉬어요."

 "난 괜찮아요. 내가 맛난 점심 사 줄 테니 내일 데이트 콜?"

 "알았어요. 오케이 콜~"


이렇게 성사된 나와 아내의 시월 두 번째 데이트는 딸아이의 스케줄과 맞물려 결국 오후나 돼서야 집을 나설 수 있었다. 집을 나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길은 조금은 쌀쌀해진 가을바람에 아내의 컨디션이 걱정됐다. 다행히 목적지 가는 길까지 아내 몸 상태에는 큰 변화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배고프다는 불만을 토해낸 것을 제외하면 어려움은 없었다.


 "철수 씨, 행주산성이 생각보다 머네요. 나 배고픈데 언제까지 굶기려고요."

 "하하, 설마 굶기기야 하겠어요. 난 얘기가 없길래 영희 씨가 아직 점심 생각이 없는 줄 알았죠. 그리고 조금 전까진 졸리다고만 해서 괜찮은 줄 알았어요."

 "산성까지 들어갈 거 있나요. 여기 앞 마트에서 막걸리 하고 파전 파는데 막걸리 한 잔 마시며 놀다가 가면 되겠네요."

 "나야 좋죠. 그럼 여기 야외에서 막걸리 한잔 하고, 먹거리촌에서 2차로 한잔 더?"


아내는 잘 먹지도 못하는 술을 가끔씩 먹자며 이렇게 분위기에 젖어 낮술 좋아하는 날 꼬드기고는 한다. 하지만 아내가 하는 말은 반은 농이고, 반은 진담인걸 알기에 난 맞장구만 쳐주고는 서둘러 아내가 좋아할 식당을 찾아봤다. 얼마 되지 않아 내 눈에 들어온 건 코다리찜을 전문으로 하는 행주산성 초입의 식당이었고, 아내와 난 식당에 들어서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를 잡자마자 코다리찜과 막걸리 한 병을 주문했다. 해 떨어지기 전 데이트에 빼놓을 수 없는 조합이다. 난 아내와 술잔을 기울이며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이어갔고, 어느새 조금 오른 술기운에 아내에게 기분 좋은 돌직구를 던졌다.


 "영희 씨, 우리 잘 살고 있는 거 맞죠?"

 "그럼요. 우리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나도 그렇지만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걸요."

 "그래도 우리가 갖고 있지 못한 걸 많이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 가끔 부럽지 않아요? 예를 들어 돈이라던가"

 "아뇨. 난 돈도 부족하다는 생각은 안 해요. 그리고 돈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걸 안 갖고 사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난 부럽지 않아요."


그러고 보면 이런 대화가 처음은 아니다. 난 가끔 이렇게 아내에게 확인을 받으려고, 아니 인정을 받으려고 묻곤 한다. '나랑 사는 게 행복하냐.', '내가 부족한 게 없냐.', '내게 바라는 게 없냐.' 이런 질문들을 에둘러 묻고는 한다. 물론 이런 질문을 할 때마다 아내는 내가 생각하는 정석적인 모범 답안을 말한다. 그래서 난 항상 이런 질문을 겁 없이 던지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다 아내가 '잘 못살고 있다', '남들이 부럽다'라고 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난 이렇게 아내 얼굴에 항상 웃음이 마르지 않게 노력할 것이다. 화려하지도, 분위기 있지도 않지만 여러 해 거듭하며 깊은 맛을 내는 적당한 가격의 코다리 맛집처럼. 오래도록 아내 곁에서 아내의 웃음을 지키며 오늘처럼 기분 좋은 가을날 데이트를 즐기고 싶다.

여러 해가 지나도 난 오늘의 질문을 또 아내에게 할 것이다. 물론 아내의 입에서 '그럼요. 충분히 잘 살고 있죠'라는 모범 답안을 기대하며 말이다. 오늘 찾은 이곳도 조금 더 늦은 가을에 오면 주변 나무들도 울긋불긋 새 옷들을 입고 분위기 있게 우릴 맞을 것 같다. 마치 우리가 예전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들었어도  꾸준히 보기 좋고, 예쁘게 잘 사는 모습처럼 말이다. 내년에는 조금 더 근사한 장소로 아내와 가을 나들이를 계획해보고 싶다.


 "영희 씨, 나랑 행복하게 살아줘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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