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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Aug 25. 2020

나폴레옹의 파리,
'프랑스 제국'을 위해 개조된 도시


 가끔 파리 시내를 일부러 산책 나가곤 했었다. 파리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서였다. 

우뚝 솟아 있는 에펠탑의 비현실성. 아름다운 세느강변을 따라 늘어서 있는 고풍스런 건물들. 거기에는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루브르와 오르셰가 있고 아름다운 시테섬과 퐁네프가 있으며 오페라와 튈르리로 이어지는 품격이 흐르는 거리가 있다. 고급스러움과 웅장함그랬다. 파리는 특별했다.
 
 유럽 어느 도시에서도 볼 수 없는 대로가 뚫려 있고 주요 건물들이 질서 있게 밀집되어 있는 곳. 잘 정돈된 공원의 가로수 아래를 걷노라면 마치 그 시대의 귀족이 되어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누구라도 금세 특별한 아름다움에 압도돼버리는 도시. 그러나 어느 날부터 파리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프랑스 하면 보통 파리의 이미지를 떠올리지만 사실 파리는 프랑스의 어느 도시들과도 같지 않으며, 오히려 ‘파리라는 특별한 나라’로 인식될 만큼 이질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바라본 파리는 과하게 고급스러웠다. 모든 기준이 ‘럭셔리’에 맞춰져 있는 듯 힘이 들어가 있었고 각이 서 있었다. 무언가 자연스럽지 않고 인위적이라는 느낌. 실제 그 모습은 프랑스의 보편적 지역색을 전혀 대표할 수 없는 ‘매우 튀는 무엇’이었다. 그리고 의문은 쉽게 풀렸다. 
 
파리는,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정복자 ‘나폴레옹’의 기획으로 만들어진 도시였기 때문이다. 
 

13세기 중세 파리 모습. 가운데 섬이 시테섬 (출처1)
1839년 파리 모습(좌) 그때까지만해도 파리는 비좁은 골목에 집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는 평범한 도시중 하나였다 (출처2,3)
파리 개조사업이 끝난 1898년 오페라 극장 대로 모습(좌) 이십대에 왕당파 반란을 두 번이나 진압한 나폴레옹은, 프랑스 육군을 세계 최강의 군대로 키웠다. 27살의 나폴레옹(우)


‘도시 곳곳에는 오물이 쌓여 있어 보행자들은 종종 코를 막고 눈을 감아야만 했다. 번쩍이는 보석상이나 향수 가게 옆에는 썩은 사과와 청어 더미가 쌓여 있었다’ 파리의 17세기 풍경을 묘사한 모습이다. 초창기의 파리는 이처럼 여느 유럽 도시들과 다르지 않았다. 노트르담 성당을 제외한 모든 곳은 좁고 울퉁불퉁한 골목이었다. 그것을 대대적으로 개조한 것이 나폴레옹이었다. 
 
 179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1800년 튈르리궁으로 입성하였는데, 그해 겨울 거리에서 암살 공격을 받는다. 그날 이후 튈르리궁을 둘러싸고 있던 노점과 판자촌과 집들을 철거한 나폴레옹의 궁전 앞에 탁 트인 광장이 생겨났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나폴레옹은 ‘제국 군대(Grand Armée)’의 영광을 기념할 기념비를 세우기를 원했다. 그것이 현재 카루젤 광장 끝에 있는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이다. 
 
그러나 개선문의 크기가 너무 작다고 생각한 나폴레옹은 1806년 50m 높이의 새로운 개선문 건설을 명하였고 그로부터 24년 후 완공된 것이 현재 샹젤리제에 있는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이다. 여기에는 나폴레옹의 야망이 숨겨져 있다. 로마 제국주의 부활을 꿈꿨던 그는 건축적 징표가 필요하였고, 로마의 개선 아치를 모델로 이집트의 탑문 구조를 결합한 기념물을 완성하였다. 개선문에는 나폴레옹과 그의 군대가 조각되어 있으며 658명의 프랑스군 제독들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같은 시기 그는 전투에 사용된 적의 대포 180개를 녹여 만든 청동 명판으로 만든 또 다른 기념탑을 세웠는데 역시 로마의 기둥에서 영감을 받았다. 파리 방돔 광장의 ‘방돔 기둥’(Colonne Vendôme)이 그것이다. 


개선문 앞을 행진하는 군대(좌) 샹젤리제의 '에뚜왈 개선문'에 양각되어 있는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 군대(우)
로마 신전을 연상케 하는 '마들렌 교회'(좌). 개선문과 같이 건설된 전승 기념탑 '방돔 기둥'(우) 우측 하단은 '팔레 부르봉'(아래)
루이 16세가 처형된 '콩코드 광장'의 오벨리스크(좌)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을 떠날 때 조제핀이 말했다 "오벨리스크 하나만 갖다 주세요" 결국 1829년 이집트로부터 선물 받았다

 

 방돔 광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그의 또 다른 건축물 ‘마들렌 교회’(Église de la Madeleine)가 있다. 1806년 역시나 프랑스군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공사가 중단되었던 건물을 완성하였다. 그리스 판테온 신전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52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들고 있다. ‘팔레 부르봉(Palais Bourbon)’도 마찬가지다. 루이 14세 딸 부르봉 공작부인을 위한 저택이었으나 혁명 이후 국가의 정치 외교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나폴레옹은 이 궁전 앞에 세워진 로마식 기둥들을 증축하였다. ‘파리 증권거래소’(Palais Brongniart) 역시 그의 작품이다. 
 
 위 건물들의 공통점은 모두 거대한 로마식 기둥들이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는 거다. 그만큼 로마제국의 영광을 구현하겠다는 나폴레옹의 ‘제국주의적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제국주의 야욕을 보여주는 건물이 잘 알려진 ‘루브르 박물관’ (Musée du Louvre)이다. 12세기 요새로 착공되었다가 수차례의 증축으로 궁으로 사용되었던 루브르는 루이14세가 베르사유궁으로 이전하면서 왕실의 수집품을 전시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 1783년 프랑스 국민의회의 법령 공포에 따라 국가 박물관이 되어 나폴레옹 치하에서 소장품이 크게 늘었으며 당시 이름도 ‘나폴레옹 박물관’이었다. 
 
나폴레옹은 유럽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탈취해온 5천여 점의 전리품들을 모아 루브르에  전시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그 유명한 ‘나폴레옹 대관식’이다. 폭이 10m에 이를 정도로 대작인 이 그림은 나폴레옹 제정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을 명한 그림으로, 그가 얼마나 자기애가 강한 인물이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렇듯 나폴레옹은 루브르 궁전에서 콩코드 광장과 샹젤리제 거리, 개선문을 연결하는 1차적인 도시 개조 사업을 벌여 바로크식 도시계획의 기본틀을 완성하였다. 최종적이고 본격적인 파리 개조 사업은 후에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특별한 파리’의 출발은 나폴레옹 1세가 열었던 것이다.  
 

스스로 황제가 되어 세상의 중심이 되고자 했던 나폴레옹(좌)과 그의 영광을 모아 놓은 공간이었던 루브르 박물관(우)
부르주아 계층이 폭 넓게 형성된 19세기 파리지앵 모습. 1810년 루브르를 방문해 '나폴에옹 대관식'을 관람하는 파리지앵들(좌) 1803년 파리지앵 가족 모습(우)
1806년 전쟁 승리 기념으로 튈르리 궁 앞에 '카루젤 개선문'을 건설한 나폴레옹과 '프랑스 제국 군대'(좌) 현재 튈르리 정원과 개선문 주변의 '명품 거리'(우)

 

 그의 도시 계획으로 건설된 위 건축물들은 파리의 특정 중심부에 모여 있으며, 건물과 건물을 연결하는 거리들은 파리 최고의 중심가로 ‘명품 브랜드들’이 밀집해 있다. ‘프랑스 군대의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들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미지’들로 둘러 쌓여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나폴레옹의 권력욕을 과시하고 존재감을 빛내주는 건축물일 뿐만 아니라 ‘럭셔리한 세계의 중심 파리’를 극대화한 기획과 배치로서 방문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렇기에 오늘도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그 거리에서, 최고급 핫쵸코와 최고급 커피를 마시며 기분이 한껏 들뜬다. 그것은 다른 어디도 아닌 ‘파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한 감정이다. ‘고급스러운 프랑스’ 덕에 나 자신까지 상류층이 된 듯한 느낌. 오직 명품으로만 도배되어 있는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신분 상승의 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렇듯 파리는 ‘귀족적이고 고급스러운 것’과 같은 의미 선상에 있다. 
 
 스스로를 황제라 칭한 나폴레옹은 자신을 세계의 중심이라 믿었다. 프랑스와 파리는 그와 같은 정체성을 지니며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했다. 이러한 세계관은 개선문을 중심으로 뻗어 있는 방사선 도로 형태에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던 것처럼 ‘모든 길은 파리로’ 통해야 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견고한 자기중심성이 어디로부터 왔는지가 가늠되는 부분이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각각 4만 프랑과 1억2천만 프랑의 '전쟁 배상금'을 받아내어 부를 챙기는 등 정부 재정 문제를 '전쟁의 승리'로 해결하였다

 

 "그는 세계를 정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파리를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도로 만들고자 했다. 수도 파리의 영광과 위엄은 그가 남긴 눈부신 유산이며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나폴레옹과 파리를 분석한 한 작가의 이 말에, 파리의 정체성 그 뿌리가 담겨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영광과 위엄’이, 힘없는 자들을 전쟁으로 누른 ‘무력에 의한 번영’에서 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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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  < 파리, 나폴레옹 > 디미트리 카살리 저 http://bitly.kr/MWf8GJdMZbKU< 도시로 읽는 세계사 > 크리스토퍼 히버트 저 http://bitly.kr/Kk7x5tIu41va, '나폴레옹 휘하의 파리' 영문 자료 http://bitly.kr/z6qUHSTHpqh, '나폴레옹과 파리 건물들' 프랑스 자료 http://bitly.kr/6ljb1BlsR7Lx, 제국주의 건축양식 < 서양 건축사 > 임석재  http://bitly.kr/R653Yfwlwg0나폴레옹의 파리 집착 그들을 만나러 간다 파리 마리나 볼만멘델스존 http://bitly.kr/hzPdUWI9DK5H나폴레옹 위키백과 https://url.kr/MA5ymi, 나무위키 http://asq.kr/DDaN1Tn0cZrF, '프랑스 제국 군대' 위키피디아 http://asq.kr/tdMErDML6aBS, 나폴레옹 전쟁 배상금 자료 http://asq.kr/go8ZLH38p5813세기 파리, 출처1 http://bitly.kr/G4jDhXxqpMt4, 1839년 파리, 출처2 http://bitly.kr/SNDTomxV6Lf, 출처3 http://bitly.kr/XXVYkQYegpAu, 1898년 오페라 대로 출처 http://bitly.kr/PPp1haU0S1q, 카루젤 개선문, 출처 http://bitly.kr/wCnsziRb9FW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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