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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Aug 31. 2020

자유로 둔갑한 망상 '자기중심성',
악은 평범하다



 7379명. 프랑스의 8월 28일 코로나 신규 확진자 숫자다. 바캉스가 시작된 7월부터 3천명대로 치솟기 시작한 숫자가 급기야 이렇게까지 폭발했다. 이 숫자는 코로나 1차 확산으로 봉쇄를 단행했던 3, 4월 숫자와 같다. 프랑스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그때처럼 프랑스 정부는 늑장 대응을 내놓았다. 사무실과 가게 등 실내에서의 마스크 착용과 도심에서의 마스크 의무화를 명한 것이다. 왜 폭발이 시작된 7월 초가 아닌 이제야 이 카드를 꺼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바캉스 시즌인 7, 8월의 프랑스는 모두가 긴 바캉스에 몰두해 있기에 누구도 참견받거나 참견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1년 중 가장 중요한 시즌을 보내고 있는 국민들에게 국가가 이래라저래라 해봤자 들을 사람도 없고 듣고 싶은 사람도 없다. 
 
 일 적게 하는 유급 휴가 천국 프랑스 국민들은 해마다 여름이면 한 달 이상씩 휴가를 떠난다. 그렇기에 프랑스 여름은 거의 모든 행정 업무가 올스톱 일만큼 국민들은 ‘기나긴 휴식’을 누린다. 한마디로 여름휴가 기간은 프랑스인들에겐 ‘성역의 시간’이나 다름없다절대 자유를 누려야 마땅한 시간. 누구도 그 시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가까운 친구들끼리도 바캉스 기간에는 연락하지 않는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프랑스 정부는 여름 동안 국민들의 손 끝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바캉스가 끝나기를 기다리니 상황이 이렇다. 예견된 참사였다.
 
개인의 자유를 맘껏 존중하고, 그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했기에 생겨난 참사. 


8월 28일부터 파리 전역에서 마스크 착용 의무화가 시행되었다
7천명 확진자가 나오고 있는 상황에서도 봉쇄를 피하기 위해, 이번주 '학교 정상 개학'를 못 박아 놓은 프랑스 정부


 우리는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개인이 자유로울 권리가 그토록 고귀한 것인가에 대해서다. 그렇다면 그 자유란 대체 무엇이고 누구를 위해서인가에 대해서다. 그리고 우리는 광화문을 떠올린다. 불과 열흘 전까지 온 국민의 피땀 어린 노력으로 일군 방역 성과를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한 그날. 그곳의 사람들. 그들을 부추긴 사람들. 그들 뒤에 있는 사람들을. 그것으로 인해 엄청난 분열을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아픈 현재를 말이다. 안타깝게도 이 역시 예견된 참사였다. 똑같은 마음을 허용했기에 생겨난 결과였기 때문이다. 
 
종교의 자유를 맘껏 존중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않아야 했기에 생겨난 참사
 
 그들은 지금도 당당히 외친다. 개인이 신 앞에 자유로울 권리를 국가가 공권력으로 억제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적어도 ‘신’을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러지 말아야 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십자가를 앞세워 그 모든 침략과 학살을 방조했던 똑같은 신을 섬겼던 이들의 ‘잔혹한 미션’을 떠올리게 한다. 오로지 신의 이름을 내걸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정당화되는 참으로 이상한 처방. 그들에게 신은 마치 그들의 탐욕을 덮어주는 가림막이자 방패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신은 그러한 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님은 분명하다. 
 
개인이 자유로울 권리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것의 수호를 위해 타인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것은 괜찮다는 의식이 위험천만한 인식이 ‘프랑스의 자유와 인권의 현주소’이다.


그 많은 어르신들이 그자리에 모였다. 극단적 자기중심성과 사유의 부재가 부른 '집단 망상'의 형체
'신'이라는 절대반지를 앞세워 '종교의 자유'를 팔아 먹는 이들. '자유'라는 절대반지를 내세워 '개인의 자유'를 들먹이는 이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의식을 우리는 광화문에서 목격했다. 그것도 일부 소수 집단에서 말이다. 종교의 자유는 소중하고 신과 만나는 순간은 고귀하기에 무엇도 그에 앞설 수 없다는 인식. 말 그대로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믿음’이란 자신의 목숨이 아닌 타인의 목숨을 말하는 듯하다. 나 아닌 자들의 생명은 모르겠고 ‘나의 믿음 수호가 우선’이라는 그 집요한 자기중심성 앞에서는 말이다. 이 얼마나 놀랍도록 일치하는 마음인가. 

 
프랑스인들과 일부 종교인들은 현재 똑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극단적인 이기심을 자유로 둔갑시킨 오류다. 그것은 자유의 본질에서 벗어나며, 신의 의미에서조차 이탈해있다.
 
 자유로울 권리는 물론 중요하다.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유로워져야만 한다. 그러나 함께 사는 사회에서의 자유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된다. 나아가 ‘인간의 생명’보다 우선시 되는 개인의 자유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공동체의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자 덕목이다. 그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실천하는 것이 맞다. 그렇기에 한국인들은 상식을 어기는 자들에게 목청을 높였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국가 시민들은 반대로 목청을 높였다. 마스크 착용과 극단적 봉쇄 정책은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았다. 서로 다른 외침이 가져온 극명하게 다른 결과를. 그리고 불과 얼마 전 무섭도록 목도했다. 그와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득세했을 때 달라진 결과를 말이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사유의 무능은,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 한나 아렌트 (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 책임자 '아이히만' 재판 모습)
'자유'와 '믿음'이라는 간판을 내세워 '욕망이라는 명령'에 따른 마음이 지어낸 위험한 결과 


 그날 어르신들을 거기로 데려간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 가장 상식을 어긴 자들은 어르신들께 ‘신의 이름을 판 자들’이다. 애초부터 신은 정치에 관심이 없으며 화려한 성전에도 관심이 없다. 신은 좌우가 없으며 헌금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는 존재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한 영접이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런 것은 애초에 신에게 하나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더욱 신은 ‘타인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여도 오직 나만을 위하라’고 고집 피울 리가 없다. 신의 이름으로 지금, 신을 욕되게 하는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주장하는 믿음과 프랑스인들이 외치는 자유가 안타까운 건 그 이유다. 오직 ‘나 자신의 욕망’을 위한 믿음이고 자유일 뿐, 타인에 대한 존중이나 이타심과 전혀 상관없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권의 나라 시민들 주장’이어서 ‘하나님의 나라 시민들 주장’이어서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그들만의 이기심이고 오만일 뿐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가장 명확한 데이터가 있다. 바로 코로나 신규 확진자 숫자다. 바캉스 기간 동안 폭증한 프랑스의 신규 확진자수와 광복절 이후 폭증한 한국의 신규 확진자수. 이것은 유럽인들이 신대륙에서 한 행위를 떠올린다. 신을 앞세워 자유를 약속했던 그들은 사실, 자신들의 욕망을 믿음으로 둔갑시켜 인종 말살이라는 끔찍함을 저질렀다. 그 결과는 ‘신’과 ‘자유’에 완전히 역행하는 ‘악’이었다.  
 

"악이란 뿔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에 있다" - 한나 아렌트


신과 믿음을 앞세운 그들의 ‘미션’에서 우리는, ‘자기중심성이라는 집요함이 어떻게 악이 될 수 있는가’를 보았을 뿐이다. 그것은 결코 신이나 자유와 관련 없는 영역의 탐욕이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자유’가 보이지 않는 ‘신’이 되어 그들의 이기심을 가리고, 종교의 자유를 외치는 자들에게는 ‘믿음’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내 자유만 중요하고 내 믿음만 중요하여 타인의 자유와 생명은 그다음이라는 생각. 그토록 오만한 자기중심성. 그것이 지금, 얼마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생명을 앗아가고 있는지 모르고 있거나 알려하지 않는 것. 
 
악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 악은 평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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