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봉쇄가 끝난 지 3주째. 프랑스는 어느 때보다 활기차게 모든 것이 돌아가고 있다. 빠르게 제자리를 찾아가는 상점들과 레스토랑의 분주함. 그동안의 답답함을 보상하려는 듯 더 바삐 걸음을 옮기는 거리의 사람들. 다시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 한껏 들뜬 모습. 그러나 이내 한숨이 나온다. 온통 노마스크인 거리의 사람들이라니. 참 프랑스답다.
여기 사는 한국 친구들이 똑같이 하는 말이 있다. "여기는 그냥 죽을 사람 죽고 살 사람 알아서 살라는 말이야. 각자도생" 이 말이 딱 맞다. 정부의 방침이라곤 처음부터 봉쇄 밖에 없었던 데다 진단검사 자체도 여전히 일본의 검사 수준을 조금 웃도는 정도일 뿐인 프랑스는, 병원으로 이송되지 못한 채 죽는 환자가 40%에 육박할 만큼 대응 매뉴얼 자체가 전무한 나라였다. 국민 전체의 꾸준한 방역 학습 같은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나라가 봉쇄가 풀렸으니 어떻겠는가. 모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거침이 없다. 누구도 나의 자유를 막을 수 없다는 거침없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스크도 안 쓰고 다니는 사람들끼리 씻지도 않은 손과 얼굴로 쪽쪽거리며 비쥬를 해댈 수는 없는 것이다.
시댁을 가기 위해 기차와 지하철을 타야 했던 우리 가족은 출발 전부터 삐그덕거렸다. 아직 11살 생일이 안 지났는데 왜 꼭 마스크를 계속 쓰고 있어야 하냐는 고집불통 사춘기 딸의 불만이 접수되었기 때문이다. 11세 이상만 마스크가 의무인 프랑스 초등학생들은 봉쇄가 풀린 후에도 노마스크로 학교에 갔고 교실 수업을 들었기에 마스크 착용 습관이 전혀 정착되어 있지 않다. 한국인 엄마는 입이 닳도록 말을 했기에 잔소리처럼만 들리니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조차 없다. 더구나 또래의 어떤 아이도 거리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으니 반발하는 게 당연하다. 이 사회가 제대로 된 정보를 주지 않았고 경각심을 심어주지 않은 결과다.
재밌는 건 흑인이나 아랍 사람들은 대부분 마스크를 쓰고 있는 반면, 마스크 안 쓰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백인들이라는 사실이다. 특히 청소년이나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은 더욱 그렇다. 아주 어린아이들이라도 아동용 마스크를 착용시킨 채 조심하는 아랍 엄마들과 달리, 유독 백인 엄마들만 아이들과 ‘자유로운 노마스크’로 거리를 당당하게 누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할 말을 잃게 만들었던 건, 시댁 가족들의 ‘너무나 당연한 방역수칙 없음’을 보았을 때였다.
파리 시내 한가운데, 그것도 대형 병원에서 근무하는 박사 시누이가 퇴근 후, 손도 씻지 않고 세수도 하지 않은 채로 연로하신 어머님과 아이들과 온 가족들과 비쥬를 하고 포옹을 하며 들어왔다. 아주버니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확인했다. 프랑스인들은 코로나로 인해 ‘잃어버린 봄을 되찾고 일상을 회복하고자 하는 의지만이 있을 뿐’ 질병에 대한 경각심이 충분히 자리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은 다음 장면에서 더 생생히 드러난다. 어머님이 새집으로 이삿짐을 들이던 날 이후로도 며칠을, 가족들은 카펫이고 방이고 욕실이고 종일 신발을 신은 채로 온 집안을 누볐다. 그리고 바닥을 청소하지 않은 채로 어머님은 다시 맨발로 밟고 다니시고 그 발 그대로 침대로 들어가신다.
프랑스인들에게 코로나에 대한 경각심이 있고 방역 수칙이 학습되어 있었다면, 절대로 이렇게 할 수 없다. 그렇지 않기에 이것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방역 수칙 준수는 '위생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하물며 이 사람들은 휴대용 손소독제도 잘 안 가지고 다닌다. 손소독제가 비치되어 있지 않은 상점도 여전히 많다. 상황이 이러하니 당연히 확진자수가 줄어들 수 없다.
프랑스의 신규 확진자는 봉쇄 이후에도 연일 세자리수를 유지하였는데, 봉쇄가 풀리고 십여일 후인 5월 28일에만 신규 확진자수가 3325명이었으며, 6월 26일 하루 확진자수는 1588명, 불과 열흘 전이었던 7월 6일에도 1375명이었다. 진단검사 횟수를 조금만 늘려도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봉쇄는 풀렸지만 실상 코로나는 여전히 똑같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하락세에 접어들었다며 웬만하면 코로나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코로나는 프랑스인들에게 ‘봄과 카페테라스의 자유를 앗아간’ 것일 뿐만 아니라 ‘여름휴가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든’ 무엇일 뿐이기에 그렇다.
프랑스인들에게 코로나는 나와 가족의 건강, 공동체의 안전과 직결된 것이라는 올바른 각성이 충분히 되어 있지 않다. 각성되어 있지 않기에 제대로 된 방역수칙은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다.
프랑스인들의 코로나 대화 초점이 "자유를 제한당해 힘들다"에 맞춰져 있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모두의 안전을 위해 마스크를 꼭 써야 한다거나, 외출 후 먼저 손을 씻고 타인을 접촉해야 하는 것들은 이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별 어려움 없이 자유를 누리는 것에만 익숙했던 사람들이기에 그렇다.
지난 7월 5일, 마스크 착용을 요구하던 프랑스 버스기사가 승객에게 폭행당해 숨진 사건이야말로, 이들이 공동체 의식은 고사하고,단 두 달의 봉쇄조차도 견딜 수 없을 만큼 스스로에 대한 통제 능력이 결여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유주의’의 한계를 비판하고 ‘공동체 지향’을 말하는 미국 석학 Michael J. Sandel(마이클 샌델)의 코로나 발언은 그래서 의미 심장하다. 그는 코로나 대응의 핵심이 ‘공동체 가치’라는 것을 명확히 해주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공동체 의식으로, 고통 분담의 정신으로 사람들이 위기에 맞설 의향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한국이 방역 성과를 거둔 이유는 넓은 의미의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결속력에 있었다. 한국의 그것은 유럽과 미국의 자선과 기부를 넘어선 행동으로 시민들 상호간의 배려와 존중을 보여주었다. 효율적인 정부조차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자유를 이행하는 것은 쉽다. 마음 가는대로 하면 되기 때문이다. 진짜 어려운 것은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모두를 위해’ 나의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함께 사는 세상'의 덕목이다.
코로나라는 전 지구적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도 ‘나의 자유만 중요하다’ 외치던 유럽인들의 태도는, 500년을 이어온 그들의 ‘쾌락주의’의 결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분뇨를 내 집 밖에만 버리면 된다는 발상이야 말로 '나만 아니면 되는' 생각으로 공동체를 전혀 상관하지 않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다. 천년을 이어온 그들의 분뇨 처리 문화부터 성적 방탕으로 인한 매독의 창궐 그리고 코로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흐름이 있다.
나만 편하면 그만인 ‘극단적 방종’과 '단절'이다. 거기에는 ‘나’만 있고 ‘우리’는 없었다. 자유를 앞세우던 그들의 모습 안에 공동체는 철저하게 실종되어 있었다.
프랑스인들 사고의 바탕에 '주멍푸'(Je m'en fous)가 있는 것과 같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이 말 하나로 그들의 모든 것이 설명된다. 사회 구성원들의 무의식적 흐름이라는 큰 줄기, 프랑스와 유럽의 이상한 코로나 대응은 그 개연적 역사의 한 단면으로 볼 때 의문이 풀린다.
연대. 프랑스인들이 좋아하는 말이다. 하지만 그 진정한 의미는,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라는 ‘함께’의 가치를 깨우칠 때 실현될 것이다. '남과 상관 없는 나'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사진들 : francebleu.fr
* 프랑스 코로나 신규 확진자 현황 자료 : http://bitly.kr/eiIi4CluD0c, http://bitly.kr/tx4EcQvV4FP
* 마이클 샌델 박사 외교부와의 인터뷰 영상 : http://bitly.kr/MghvfsMHKj * 병원으로 이송되지 않은 채 죽는, 프랑스 코로나 사망자 40%의 진실 https://brunch.co.kr/@namoosanchek/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