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롱이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이번 코로나 강경 조치로 지지율이 올랐다. 사람들이 겉으론 밥그릇 챙기기로 큰 소리 내면서도 속으로는 실은 두려워한다는 방증이다. 미운 놈이라 해도 보호받고 싶고 그것을 지지하는 마음. 이처럼 생존의 문제 앞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기적이다. 그러나 모두가 그러할 때 한국인만은 예외였다. 세상은 그것이 신기한 것이다.
오히려 한국 내에서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눈에 띄는 건 코로나 사태를 발 빠르고 지혜롭게 대처한 한국을 가리켜 자주 등장하는 말들이다. '빨리빨리 문화' 그리고 '국뽕' 또 하나는 '국난 극복이 취미'라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저 말들이 이 시국에마저 한국인을 대표하는 특징인 것처럼 돌아다니는 것이 탐탁지가 않다. 저 말들 자체가 한국인을 비하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빨리빨리'란 말은 한국인들을 부정적으로 비꼴 때에 사용하는 말이다. 당연히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참을성이 없고 유행에 민감하며' 또는 '새로운 것에 우르르 몰려드는' '금방 끓었다가 식는 냄비 근성' 같은 것들이었다. 근데 이번에 그 유명한 드라이브 스루를 번개처럼 개발하고 몇십만 명에 달하는 국민들을 빠르게 검사하며 매우 낮은 사망률을 보이자 그것 역시 '빨리빨리' 때문이란다.
하지만 우리는 '인내심이 없어서' 그것들을 단 시일에 이룬 것이 아니라, 원래가 기민하고 기발한 사람들이어서, 부지런하고 똑똑한 사람들이어서 그런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들이 프랑스인들처럼, 공원을 거닐며 봄볕을 즐기는 낭만을 모르는 사람들이어서가 아니라, 그것보다는 나와 내 가족의 안전, 나와 함께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안전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봄볕을 제쳐두고 모두가 한 몸인 듯 움직였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그것을 '빨리빨리 문화'라고 뭉뚱거리거나 '집단에 순응하는'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스스로를 깍아내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감부터 거북스러운 '국뽕'이라는 말이 있다. 참으로 품격 떨어지는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다. 최근의 BTS와 기생충의 성취 앞에서도 이 말이 부쩍 쓰이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말에는 깊은 자조가 담겨있다. 말 그대로 '내 나라가 자랑스러워 기쁜 것'이 왜 약에 취한 상태 인양 표현되어야 하는지부터가 거슬린다. 저 말 자체가 품격의 반대에서 온 저열한 표현이고 '국가의 품격'을 깎아내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 한 사람이라도 더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밤잠을 헌납하고, 가족들을 제쳐두고, 초과 근무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수고해주고 계신 수많은 의료진분들의 희생을 꼭 저렇게 표현해야만 할까? 내가 가진 마스크를 양도하고 어르신들을 위해 집집마다 나눠주고 격리된 사람들에게 음식을 해주는 국민들의 그 마음을 이렇게 말해야만 할까? 다분히 '국가적 성취나 기쁨' 그로 인한 '국민들의 기쁨'을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말이다.
어느 사회에서건 이타적인 마음으로 자신을 기꺼이 헌신하고 희생하는 사람들의 행동은 당연히 칭송받아 마땅하다. 더구나 그것이 대다수 국민들의 모습이라면 더더욱 그 공동체 시민들은 누가 뭐래도 높은 시민 의식을 가진 것이 맞다. 박수는 못 쳐줄망정 그 마음을 정체불명의 저열한 말로 깎아내려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국난 극복이 취미' 나는 이 말이 불편하다. 국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국가에 닥친 난국' 나라 전체가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상태, 전쟁통과 같은 상황을 말한다. 그렇다. 우리가 배운 우리 역사는 온통 짓밟히고 또 짓밟힌 수난의 흔적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까지 계속되어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부단히 일어섰고 힘차게 일어섰으며 놀랍게 뻗어나갔다. 그랬기에 그런 우리의 '근성'을 두고 저러한 말이 생겨났다는 것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저 말에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할머님 세대가 또 그 할머님 세대가 배를 곯아가며 가족을 잃어가며 고통의 한 복판에서 숨이 멎어갈 때의 순간에 대한 애도가 전혀 담겨 있지 않다. 그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에 대한 존중은커녕 너무나 가벼운 어감에선 조롱마저 풍긴다. 그러나 고통을 뚫고 나오는 것이 어떻게 즐기는 취미가 될 수 있을까. 그 무게는 이렇게 가볍게 말하여지면 안 되는 것이다.
국난 극복은 우리의 '취미'가 아니라 우리 존재의 '증명'이다. 한국인은 어떠한 환란에도 꿋꿋이 일어서는 사람들, 밟아도 일어서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바위 같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 바위 같은 마음이 나온 힘은 바로 '자기희생' 남을 나로 여기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하다.
물론 한국 사회는 분명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기성 권력자들의 탐욕이 그러한 시스템을 만들었고 그것들이 우리를 여전히 옥죄고 병들게 한다. 하지만 국민들 개개인의 성정은 그렇지 않다.
만약 우리에게 유럽과 같은 복지 혜택과 시스템이 있었다면 지금의 우리 사회 모습은 완전히 달랐을 거라고 생각한다. 모두 먹고살기 힘들어서, 사는 게 팍팍해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인들은 내 것을 떼어서 남을 준다. 폐지를 주워 모은 돈을 성금으로 낸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자신을 희생한다. 그것이 진짜 살아있는 시민 의식이다.
이번 코로나 사태로 미국을 포함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한국을 보며 느끼는 바가 아주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겉으론 말하지 못하지만 한국인들만의 근성과 저력을 보며 속으로 무서움까지 느끼지 않았을까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여주고 있는 것들은 자기들이 절대로 이르지 못할 것들이기 때문이다. 똑똑함과 부지런함은 제쳐두고, 시민 개개인의 자발적인 헌신과 희생은 저들이 흉내 낼 수조차 없는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은 인간이 지닌 가장 숭고한 정신 중에 하나다. 그 이유는 자기희생이 '가장 순수하게 이타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시켜서 되는 것이 아닌 스스로의 가슴에서 우러나와야만 가능한 것이다. 즉 어려운 철학 교육과 논리로 무장한 지식, 인권에 대한 토론으로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코로나가 알려주었다. 우리 한국인들은 누구보다 지혜로우며 심지어 세상 가장 따뜻한 가슴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이제 그것을 우리 스스로만 인정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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