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산책 Dec 07. 2021

융과 대화하며, 이곳에 있는 이유


원장님 안녕하세요.

기억하실런지 모르겠습니다. 그새 5년이란 시간이 흘렀네요.


2013년 가을 무작정 융 공부를 꼭 해야겠다며, 제가 사는 프랑스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을 편지로 여쭈었지요. 원장님께서는 바로 답을 주시며 ''신기하다''고 하셨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제게 <길> 지 우송까지 바로 해주셨고요. 5년이 지난 작년 10월 또 <길> 지를 받았습니다.


36호 <길> 지를 받은 날.. 많이 뭉클했답니다. 얼굴도 모르고 연락처도 모르는 이국 만리의 사람에게, 이렇게 한결같이.. 5년 전의 약속을 지켜주시는 걸까. 하고요.


나는 이제 고향의 인연들마저 다 정리해가는 중인데, 거기서도 여기서도 이제 이방인에 익숙한 고독 속에 있을 뿐인데... 융의 메시지들은 어떤 인연이기에 이렇게 내 손을 끝까지 잡고 있는 걸까. 하고요.


마음이 많이 헝클어져있던 상태 속에 받은 <> 지는 제게, '어디서  헤매더라도 자신의 길을 찾길 바란다'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고맙습니다.  안에 융의 숨결이 깊게 박혀있었음을 다시 일깨워주셔서요. 다시 <> 찾을  있는 용기를 주셔서요.


어쩌면 융은 그런 나를, 기다려왔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5년 동안 다른 곳에서 많이 헤매었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음도 고백합니다.


불교 공부에 깊이 빠져 또 다른 시공에서 치열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진짜 진리는 인간이 만든 신념과 가치 따위로 발견하거나 득할 수 없다는 것을 통렬하게 깨치고 홀로 다시 앉았습니다.


주류 학문으로는 진짜 진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편견이 있었습니다. 인간들은 늘 어리석게도 원형을 훼손한 채 자신들 멋대로 변형시켜놓은 것을 진리라며 우기고 강요하니까요. 하지만 그것 역시 저의 컴플렉스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봅니다.


길은, 길을 찾아 나서는 자에게 발견될 뿐이니까요.


칼융이 직접 그린, 그의 책 <Red Book> 속 무의식에 지배되는 이미지


진리는 도서관이나 상아탑, 예배당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오로지 명료한 정신 속에서만 그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요. 하지만 그것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때론 도서관의 지식과 상아탑의 권위와 예배당에 모인 사람들이 필요하기도 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습니다.


그리고 저의 머릿속을 맴돌던 이 말 <자비는 정의를 이긴다> 원장님께서 숙제처럼 여겨졌다는 이 말을 보는 순간 지금의 내게, 정확히 필요한 화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또다시 '충분히 몸 값을 치르지 못한 채로 과거에 집어삼켜지며' 그 대극 속에 매몰되어 가고 있었으니까요...


저 말을 곰곰이 되새기는 동안 신기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몇 년 전부터 반복적으로 꾸어온 꿈의 의미가 알아졌다는 겁니다.


3년 전 집중적으로 비슷한 형태의 꿈을 꾼 적이 있었습니다. 무언가 좋은 일이 예비된 꿈이라는 건 알았지만, 그것이 모두 정확하게 '한쌍'의 형태였다는 것의 의미를 놓쳤었습니다. 꿈 모두가, 하나는 남성적인 형태였고 다른 하나는 여성적인 형태로 확실하게 대조되는 모습을 지녔었다는 것을요.


얼마 전 다시 그 꿈의 연장선인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알았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대극을 가리키는 꿈이었다는 것을요. 정확히는 '대극의 통합'을 상징하는 '융합의 고통'을 예견한 꿈이었다는 것을요. "질서와 혼돈이 만나면 신성한 아이가 태어난다" 융의 이 말은 바로 나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이었다는 것을요.


원장님은 지금, 무엇을 찾아 그곳에 계시나요?

저는 오직 저 자신에 대한 이해와 존재에 대한 이해, 정신의 자유를 위해 이곳에 있습니다.

그것만이 제가, 융과 대화하며 여기에 있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 길로 가는 길은 제게 '커다란 고통'을 요구합니다. 때로는 앞이 너무 캄캄하여 가슴이 미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대극의 융합이라는 고통 속을 통과하고 있는 지금이 외롭지만 귀하게 다가옵니다.....



2019년 1월, 한국융연구원 원장님께 드린 편지

* <길> : 한국융연구원에서 발행하는 정기 간행물

칼융이 직접 그린, 그의 책 <Red Book> 속 무의식에 압도당하는 이미지

 
"무의식을 의식화하지 않으면, 무의식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데,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고 부른다" - Carl Jung




'운명'이라 불린 시간들을 지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나를 비우고 또 비우며 그저 바라본다.


이 편지가 떠올랐다. 내가 언제나 당도하고 싶었던 곳. 돌아가고 싶었던 집. 자유가 된 자리.

가슴 시리도록 목이 메이도록 가슴에 다시 새긴다. 내가, 지구 반대편 이 먼 곳에까지 와, 외로운 시간들을 통과하고 있는 이유. 그 한 점을 향한 것임을.


그것이, 어떤 상아탑적 이력도 화려한 경력도 밀어줄 연줄도 없는. 그저 잡초처럼 생겨나 잡초처럼 살아가는 한 생명의 이유인 것이라고.

그것 하나로 고요하고 고요한 숨을 쉰다고. 그것이 내 최고의 경건이라고.
 


매거진의 이전글 보궐선거와 매트릭스, 자유인 채현국 선생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