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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Apr 08. 2021

보궐선거와 매트릭스,
자유인 채현국 선생님


대선 전초전이라는 재보궐선거. 집권당은 성공하지 못했다. 이 먼곳까지 모두의 탄식이 들린다. 

오늘부터 온갖 뉴스와 미디어는 촛불민심에 패배감을 안겨주는 단어들로 도배될 것이다. 
어떻게든 정권을 되찾으려는 야당과 세력들의 여당과 대통령을 향한 총공격이 시작될 것이다. 아주 맹렬하게. 그것이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파간다의 치킨게임 룰이니까.

4년 전 대선을 떠올린다. 촛불민심을 등에 업고 뜨거웠던 그때를. 촛불 대통령을 탄생시킨 촛불 수만큼의 순수한 열정들을. 이토록 식상하고 피로한 게임의 룰을 단번에 헝클어뜨린 쾌감. 그러나 링 위의 게임은 계속되며 시민과 다른 곳을 바라보는 욕망들은 자신들 영역을 되찾을 날을 기다려왔다. 그들의 자본과 권력은 언제든 시민을 그들에게 종속시킬 준비가 되어 있으니.

"하도 속다 보니까 속는데 습관이 들어서 
그 용기를 못 내는 겁니다. 우리가 쉽게 진보니 보수니 말하는 자체가 우리의 각성을 방해하고 있어요. 권력이 미치는 한에서, 그들이 원하는 쪽으로 전달되고 전파되지, 그들이 원치 않는 사실과 철학은 전파되지도 전달되지도 않습니다"


삶의 끝에 서계신 분의 이토록 순수한 얼굴. 채현국 선생님


이제는 고인이 되신 채현국 선생님 말씀이다. 프로파간다 자체가 가진 허상이다. 진보와 보수. 전라도와 경상도. 남과 북. 이 고루한 이분법. 작은 땅을 두 동강으로 만든 똑같은 대중 분열 정책. 빨갱이와 간첩을 만들어낸 프레임이자 무수한 죽음과 서슬 퍼런 역사를 만든 괴물.

그들의 선동에 휘둘리는 자 누구인가. 누가 지금 목에 핏대를 세우며 상대를 '적'이라 말하는가. 누군가를 '적'이라 규정하는 사람이야말로 우리를 분열시키는 자이다. 

우리에게는 진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보수가 적도 아니다. 우리는 그저 땀 흘려 일한 기쁨과 감사를 느끼고 싶을 뿐이다. 함께 돕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 필요할 뿐이다. 존재의 기쁨을 나누고 싶을 뿐이다. 이념을 만들고 편을 가르고 서로를 저주하는 짓은 애초에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았다.

적대 구도 속 서로를 향한 분노야말로, 프로파간다라는 게임을 만든 자들이 바라는 것이다. 이 게임은 군중의 분노와 열등감과 패배감과 헛된 욕망으로 굴러가는 쳇바퀴이기에.

영화 <매트릭스> 장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스스로 생각해. 남이 하는 말도 듣지 말고,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지세요. 옳게 살려고도 하지 말고 치열하게 살았다고도 말하지 말아요. 신나게 살았으면 된 거지"

다시 채현국 선생님 말씀. 스스로 사유하는 훈련을 하지 못하면 자꾸만 의존하려 든다. 그럴듯해 보이는 사람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닌다. 
'이럴 땐 이렇게 하세요'라고 콕 짚어주는 책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목소리 큰 사람들에게 쉽게 휘둘린다. 정치인들의 연예인쇼에 현혹된다. 미디어와 언론이 가리키는 손가락을 바라본다. 거미줄에 걸려든지도 모르게 그 안에서 꼬리잡기 놀이를 한다. 매트릭스를 조종하는 자들이 원하는 모습이다.

진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자유롭고 싶다면, 내가 먼저 나의 꼬리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나야말로 매트릭스 안의 장기 말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 게임은 전의를 불태우게 하고, 정의를 실현하게 하고,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을 주지만 딱 한 가지 줄 수 없는 것이 있다. 매트릭스를 벗어나 있는 오롯한 나. 자연인으로 존재하는 나. 국가와 이념이 있기 전부터 존재해왔던 숭고한 나의 자유. 진짜 자유.  


영화 <매트릭스> '빨간약 파란약.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남들에게 별로 지지받지 못하면서도 제멋대로 사는 인간. 실제는 그 사람은 자유로워서 아무도 못 가는 지옥까지 들어갈 수 있는 음악인입니다마는, 그런 음악인을 우린 건달이라고 하지. 돈 벌려고 하지 않고, 세력 잡으려고 하지 않고, 출세하려고 하지 않고, 그저 살아가는 사람을. 좀 멋지게 사는 사람을그 정도가 내가 바라는 바지 뭐"

나와 소망이 같으신 진정한 멋쟁이 채현국 선생님. 세력을 잡아야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고, 자신을 드러내야만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들. 그렇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는 사람들. 목소리 큰 그들이야말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인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닐까. 우리가 진짜 마음을 다해 숙고하고 공을 들여야 할 것은.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나 자신이 아닐까.

오늘의 결과는 절망을 허용한 이들에게는 절망이 될 것이고, 절망을 모르는 이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을 것이다. 나의 탄식과 체념을 바라는 이들이 원하는 모습이 되어줄 것인가 아닌가는 나에게 달려있다. 고루한 링 위에서 질식하지 않고자 자유인이 되어 행복하셨던 채현국 선생님처럼.

생의 끝에 서 계신 분의 투명한 얼굴을 볼 수 있는 축복


며칠 전 문득 채현국 선생님이 생각났었다. 고인이 되신 4월 2일이었다. 놀라웠다. 오래도록 마음에 품으며 꼭 한번 뵙고 싶던 분이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 진정한 어른을. 끝까지 소년의 얼굴을 한 자유인을. 세상을 떠나시던 날 무의식으로 접속했다. 



채현국
선생님.
오늘도 우리가 사는 땅은 소란합니다.
많은 이들은 낙담했고 체념니다. 
하지만 기억할게요.

우리는 지금 여기서,
자유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요
.


고맙습니다. 
그곳에서도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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