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낯설게 보기 1화
"그놈이 그놈이다"
사랑의 환상이 걷히고 남자에 절망한 여자들은 말한다. 허나 저 말은 '놈들'한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닌 콩깍지가 낀 모든 대상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필자는 유럽에 대한 로망을 가진 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거기가 거기다"
프랑스 생활인으로서 필자는 '칭송받기만 하는' 이 땅에 살면서, 프랑스와 프랑스인에 대해 이곳의 문화에 대해 수없는 의문들과 모순들을 맞닥뜨렸고 결국 커다란 질문들을 품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상대적으로 초라한 가치로 추락해버린 '우리네 것'에 대한 재발견과,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 져버리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본 매거진은 그에 대한 사유를 담담히 풀어내고, 나아가 '모두가 닮고 싶어 하는 유럽의 가치'와 이제는 '퇴색돼버린 우리의 정신적 가치'를 함께 생각해보기 위해 만들어졌다.
< 프랑스 낯설게 보기 >
1화. 프랑스는 낭만적이지 않다.
프랑스는 낭만적이다? 프랑스인은 우아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것은 없다. 프랑스도 똑같이 사람 사는 곳이다. 그리고 '문명사회의 개인'이 체감하는 삶은 어디나 다 비슷하다.
파리 지하철의 오줌 지린내는 알려져 있지만, 프랑스 거리에 넘쳐나는 개똥을 아직 사람들은 모른다. 프랑스인의 대부분은 보통 상상하는 금발에 훤칠한 키가 아니라 갈색 곱슬머리에 작은 키를 가지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아랍인들이나 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매우 큰 비율을 차지한다는 것을, 정체를 알 수 없는 난민들이 꽤 많다는 것을, 행정업무는 아주 느리고 복잡하며 불친절하다는 것을, 병원에 가려면 아파도 며칠씩 예약일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밤거리를 여자 혼자 걷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동양인이 길거리에서 인종차별적 조롱을 당해도 하나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을, 실제로 프랑스에 살지 않으면 알 수가 없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인스타 사진들은 오늘도 '뭔지는 모르지만 우아하고 어쨌든 우월한 나라'라는 그릇된 선망들을 뿌려대고 있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이미지'는 유럽의 여러 나라들 중에서도 너무나 강력하게 '메이킹' 되었기 때문에.
하지만 로망만을 쫓아왔다가는 큰 코 다치는 게 이 땅이다. 바로 나의 이야기다.
어린 시절 간직한 '유럽에 대한 로망'은 한국이라는 억압된 교육시스템에서의 성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의 교육 시스템에 압살 당할수록, 어딘지 자유로워 보이는 '유럽의 공기'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었다. 우물 밖에서 보면 그 무엇이 안 이뻐 보일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좀 더 생기 발랄한 시절 유럽의 어느 땅에서 호기심 가득 안고 공부할 수 있는 행운 같은 건 나에게 없었다. 그러다 느지막이 한 남자를 만났고 결혼했고 프랑스인인 그를 따라 이 땅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 순간 이후로 계속되는 좌절감의 연속을 홀로 맞닥뜨려야 했던 나 자신과의 끊임없는 사투가 시작되었다. 하물며 그것들은 매우 생경하고 낯선 형태이기까지 했다. 불어를 할 줄 모른 채로 가족도 친구도 없이 갓난아기와 독박 육아를 하던 고단함으로 시작된 내 유럽 살이. 외계인의 나라에서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아이처럼 '덜 떨어진 내 모습'에 익숙해지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나의 프랑스에서의 삶은, 한 생활인으로서 생존하기 위한 투쟁에 더 가까웠다. 그 처절한 생존 앞에 낭만 같은 것은 자리할 틈조차 없었다.
잠깐 스쳐가는 여행객의 시선에서는 이국적 풍광 자체로 낭만적일 수 있다. 하지만 실제 프랑스 사람들과 외국인의 프랑스 생활은 낭만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현지 외국인들이 느끼는 감정은 그보다는 차가움이나 소외감에 더 가까운 게 현실이니까.
누구나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선망이 있다. 상대적으로 '선진적'이라는 나라들은 여타 다른 나라들의 로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하다. 온갖 매스컴과 책들은 너도나도 '유럽 시민들'의 복지와 교육이 얼마나 우월한지를 말한다. '북유럽처럼' 이 말은 한국인들에게 어느새 하나의 로망 코드로 자리 잡았다. 말 그대로 '로망' 이기 때문에 '낭만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막상 낭만의 실체는 없다.
물론 저소득층과 서민에 대한 사회보장이 상대적으로 잘 정착되어있다는 것이 '낭만을 얘기할 수 있는 생활수준'으로 데려왔을 수는 있다. 하지만 일상을 사는 프랑스인들은 여기 있다는 그 낭만이 뭔지 모른다. 실은 낭만적이라는 말 자체가 환상을 불어넣기에 적합한 신기루 같은 말이고 그렇기에 '프레임 안에 있을 때에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프랑스가 낭만적인 게 아니라, 프랑스라는 '네임'을 낭만적으로 만들고 싶은 '집단 욕망의 투사'가 프랑스라는 이미지를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 신기루의 탄생과 완성은 전적으로 '프랑스=낭만'이라고 주입된 집단 무의식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이렇듯 '생활인'과 '여행객' 사이의 깊은 괴리감은 현지의 이방인들 몫으로만 던져져 있다. 어쩌면 우리네 실존 자체가 낭만적이지 못하기에 우리는 낭만에 기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신기루를 쫒는 '여행객'에게 프랑스는 언제까지나 낭만적일 것이다. 하지만 실존을 사는 '생활인'에게 낭만적인 프랑스는 처음부터 없었고 여전히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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