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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산책 May 26. 2020

프랑스는 자유롭고,
프랑스인은 자유분방하다는 환상

프랑스 낯설게 보기 3화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한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의 가치’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작은 자유마저 박탈되어 있는 삶의 모습에 괴로워하며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과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논란이 되는 것이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서방국가들에서의 논란이었다. K-방역의 핵심으로 떠오른 한국의 ‘위치추적 시스템’이 그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개인의 자유를 극단적으로 침해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들은 과연,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알고 있을까.
 
 한국의 위치추적 시스템을 두고 독일의 헌법학자는 ‘히스테릭한 파시스트 보건국가의 탄생’이라 했고, 프랑스 변호사는 "한국은 감시 고발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운 나라로, 오래전부터 개인의 자유를 경시해왔고 그런 자유가 존재하지도 않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 견해는 ‘정확한 정보의 부재’와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의 본질적인 이해 부족으로 인한 오해였다. 한국 정부가 이 시스템을 활용한 이유는 감염자를 격리하여 국민의 건강을 지켜주기 위함이었고, 국민들이 동의한 것 역시 ‘공동체 전체를 위한 대의적 공감’이었기 때문이다. 무상 검사와 익명 검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정부는 확진자의 이름, 성별, 나이 등의 정보가 제외된 동선만을 공개하여 ‘공공의 이익에 부합되게’ 활용하도록 했다. 이러한 공격적인 방법은 사람들이 바이러스와의 접촉을 피할 수 있게 하였고 확진자 0명이라는 기적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이렇듯 위치추적 시스템은 공동체 위기상황에서 ‘모두에게 이로운 정보’로 기능하며 ‘공공의 선’에 부합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수의 시민들이 이 시스템으로 스스로의 건강을 지켜내었다는 사실이고, 그것이 어떤 개인의 자유도 침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미국에게 선물해준 자유의 여신상은 정확히, 프랑스가 식민지배 정당화를 위해 '만들어낸 이미지'와 똑같다. '나의 자유'만 중요한 제국주의 국가들의 '이미지 선점'이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서방 국가들은 제대로 된 정보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자신들의 편협한 관점과 논리로 우리를 ‘재단’한다. ‘그들이 아는 아시안’은 여전히 독재의 수렁 아래 신음하는, 자유를 억압당하면서도 순종하는, 자유와 인권의 개념을 성숙하게 체득하지 못한 시민들이기 때문이다. 그 숱한 독재 정부들이 탄생한 배경에, 아시아 국민들이 당한 자유의 억압 뒤에, 바로 그들 자신이 있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채로 말이다. 얼마나 많은 한국의 민중들이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피 흘렸었는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지도 못하거나 깡그리 무시한 채로 말이다.


 하물며 한국에 주재하는 BBC 기자는 확진자 0명이던 날
"한국의 위치추적 시스템이 이름, 나이, 성별, 직업을 공개하지만 기적을 만들었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러할진대 본국에서 바라보는 그들이야 오죽할까. 프랑스에서 가장 많이 다뤄지던 한국 기사는 북한의 동향과 김정은에 관한 것이었지 대한민국이 아니었다. 박근혜가 당선되었을 때도 프랑스인들은 ‘독재자의 딸’이라는 헤드라인 때문에 북한 뉴스인 줄 알았다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처럼 한국이란 나라는 그들에게 존재감 자체가 없었다.


 관심이 없었기에 어떻게 흘러왔는지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고 나아가 알아보려는 노력 자체를 하지 않는다.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책임 있는 발언을 하면서도 말이다. 문제는 저 말들에는 ‘무지’만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배경에는 그들의 오랜 제국주의적 습성이 숨어있다. 그들은 자유와 인권을 성숙하게 체득한 사회이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나라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인식. ‘무지몽매한 사회와 그에 순응하는 국민들’이라는 무의식적 비하가 깔려 있는 것이다. 


"사생활은 매우 중요한 인권이지만, 절대적인 권리는 아닙니다" - 강경화 외교부장관 발언
"환자들의 사생활과 코로나 위협으로부터 공동체가 보호돼야 하는 필요성을 비교했을 때, 답은 매우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인권의 주인’이 마치 그들인 것처럼 세상이 흘러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자유와 인권의 상징이라 믿는 그들은 '자유를 모르는 무지한 아시안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  


 프랑스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자유와 인권의 나라. 똘레랑스의 나라. 무언가 고결한 가치는 다 담겨 있는 것만 같은 그것을 쟁취해낸 ‘선구자’라는 경외감. 야외 카페테라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 모습은 자동반사적으로 자유분방함으로 이어진다. 심지어 몇 년 전 파리 한가운데서 대규모 동시다발적 테러가 있던 날 주말에도 파리 시민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카페테라스에 모여 커피를 마셨다. 그 모습을 보며 세상은 또 찬사를 보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한 자유’라고. 그것이야말로 '삶을 긍정하는 진짜 자유'라고.


 그러나 그 ‘똑같은 자유’를 우리는 코로나 정국에서 보았다. 내가 아닌 타인들이 정체모를 전염병으로 죽어나갈 때도 그들은 ‘나의 자유를 위해’ 카페테라스에서 커피 마실 자유를 외쳤다. 영업금지를 앞둔 밤에는 ‘종말이 오기 전에 마시자’며 수백 명이 거리를 누볐다. 지금은 어떠가. 미국과 독일에서는 연일 과격 시위가 끊이지 않았다. 봉쇄를 해제하라는 시민들의 요구였다. 시위자들은 말했다. ‘자유를 달라’고. 정부의 조치는 자유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프랑스인들이 이 시위를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코로나 초기에 보여준 행태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그들의 ‘차가운 개인주의’의 단면을 엿보았다. 그것이 이들이 말하는 자유라는 것을.


거기까지가 그들이 아는 자유인 것이다. 나의 불편함을 강제하지 않는 것. 그것이 침해당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자유.

프랑스인들이 카페테라스에 앉아 오후를 즐기는 동안, 프랑스 폭격기는 '반군'을 소탕한다며 아프리카 마을을 폭격한다
식민지 수탈로 세워진 왕국이 풍요를 누리며 '자유'를 외칠 때, 그들 폭격기가 휩쓸고 간 아프리카 마을은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이 설령 공동체 구성원들의 건강과 직결되고 공동체 안전에 위협이 되는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러나 그들 행위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결코 미화될 수 없다. 그것은 자유를 빙자한 이기심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퍼지든 말든 내 자유가 더 소중하다는 마음이 어떻게 ‘쿨한 자유’가 될 수 있을까.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잠깐의 불편함을 참지 못한 나의 이기심으로 오늘도 누군가는 소중한 생명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나의 자유가 소중한 만큼 남의 자유도 소중하다. 그것이 생명과 관계된 것이라면 더욱 나의 작은 자유는 잠시 포기할 수 있어야 마땅하다. 그것이 함께 사는 사회의 미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공동체는 상관없고 누구도 무엇도 '나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 고만 주장하는 것. 


그래서 그들이 외치는 자유는 공허하다. 거기에는 ‘나’만 있고 ‘우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서방 사회가 코로나 앞에 힘없이 무너진 이유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이 외치는 자유가 그토록 고결한가. 그들은 세상에 알려진 대로 자유와 인권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가. 그들은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실천하는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이제 나만의 의문이 아니게 되었다. 그들이 그토록 비난하고 싶어한 '위치 추적'은 생명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인권과 인명. 무엇이 더 중요한가. 이것을 강경화 외교부장관은 독일방송에서 명확히 짚어주었다. "사생활은 매우 중요한 인권이지만, 절대적인 권리는 아닙니다" (인터뷰 영상: http://bitly.kr/wAJudwHFqd)


 이제, 그들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이다. 


 프랑스 당신들은,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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