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율 Apr 04. 2024

트래킹인지 고행인지 모를 따반마을 투어

결국 나는 소수민족 마을 트래킹을 가기로 했다. 날씨는 포기한 지 오래. 무조건 간다. 그냥 간다. 며칠 전 여행사에서 실망을 했기에 호텔 상품을 신청했다. 직원이 어찌나 좋아라 하던지. 나를 볼 때마다 투어를 하라고 권하던 남자 직원이었다.


우리 호텔에서 같이 가는 사람이 다섯 명. 아침 일찍 로비에 모였다. 직원은 장화를 빌려준다고 갈아 신으란다. 얇디얇은 고무장화였다. 내 발이 워낙 작아서 맞는 신발이 없었다. 제일 작은 사이즈도 헐렁헐렁. 비 오고 미끄러운 진흙탕 길에서 괜찮을까? 두꺼운 등산 양말을 가져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얼른 방으로 올라가 양말 하나를 더 신었다. 조금 낫다.


머리에 빨간 두건을 두른 여성 가이드가 우리를 데리러 왔다. 다른 호텔 두 곳에 들러 합류하는 사람들과 만났다. 우리 일행은 뉴질랜드 모녀, 네덜란드 부부, 인도 청년, 프랑스 아가씨, 싱가포르 부부, 캘리포니아 커플, 나 한국인. 다양한 국적이 모였다.


장화가 없는 사람들은 거리의 가게에서 장화를 빌렸다. 프랑스 아가씨는 내 우비를 보더니 자기도 같은 걸로 샀다. 맨 난중에 합류한 인도 청년은 운동화에 비닐봉지 하나를 덜렁 들었다. 그걸로 괜찮... 겠어요? 하여튼 이제 준비는 끝.


그런데 배낭을 멘 소수민족 아줌마들이 사파 타운에서부터 따라왔다. 그들은 일행 한 명 한 명과 얼굴을 마주하며 "Where are you from?" "What's your name?"을 물었다. 이들도 같이 트래킹을 하는 건가? 가이드의 동료들인가? 가이드는 아줌마들에 대해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들을 내쫓지도 않았다.



우리는 포장도로를 따라 한참 걷다가 산길로 들어섰다. 가이드가 인디고풀을 알려 주었다. 손바닥에 비비자 파르스름한 색이 물들었다. 이제부터 완전히 미끈거리는 진흙탕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아줌마들이 따라온 이유가 밝혀졌다. 그들은 한 사람씩 맡아서 손을 잡아 주었다. 처음엔 다들 "It's ok"라면서 부담스러워했으나.


갈수록 가파른 진흙길이 나왔다. 무릎 아래까지 푹푹 빠졌다. 그들의 손을 잡지 않으면 걸음을 내딛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내미는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도우미(모르는 아줌마에서 도우미로 승격함) 없이는 아예 걷지 못할 지경이었다. 일부러 이런 길을 골랐나? 꼭 이런 길로만 가야 하나? 경치고 뭐고 넘어지지 않고 걷는 게 큰일이었다.


도우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바지와 손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인도 청년은 장화를 신지 않아서 운동화가 엉망이 되었다. 누군가 넘어지면 안타까운 감탄사와 함께 웃음이 터졌다. 나는 나자빠질까 봐 내 담당 도우미의 손을 꼭 붙들고 다녔다. 그렇다. 아줌마들이 한 사람을 고정으로 찍어놓고 담당하는 시스템이었다.   



트래킹인지 고행인지 모를 두 시간이 흘렀다. 11시 반, 라오짜이 마을에 도착했다. 사방에 다락논이 내려다보이는 큰 마을이었다. 가이드는 휴식 시간을 선포했다. 다들 사진을 찍느라 분주한 가운데 갑자기 도우미들이 바빠졌다. 배낭을 바닥에 내리고 주섬주섬 수공예품을 꺼냈다. 직접 수를 놓아 만든 가방이나 지갑 같은 것들이다.


나를 담당했던 얌전한 아줌마가 작은 소리로 "여기서 나는 집에 돌아가요."라고 말했다. 음??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배낭을 열었다.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하니 너는 그만 내 물건을 사달란 의미였다. 그녀는 두 시간 동안 나의 구명조끼가 되어 주었다. 어떻게 안 살 수가 있겠어요. 무조건 사야 합니다.


나는 작은 파우치 두 개를 집었다. 아쉽게도 이분의 솜씨가 그리 좋지 않았다. 다른 아줌마에게 더 예쁜 물건이 많았지만 그걸 사면 배신이지. 하나당 이십 오만 동(13000원). 사파 시내보다 두 배나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부르는 대로 사야지 절대 깎을 수는 없었다. 물건값이라기보다는 진흙길에서 손 잡아준 값이었으니까.


이러려고 따라오셨구려. 가이드와 이들은 상부상조의 관계였다. 사실 가이드는 길만 안내했을 뿐 별로 한 일이 없었다. 초반에 인디고에 대해 알려준 것 외에 설명에는 젬병이었다. 실제 역할은 이분들이 다 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물건 한두 개를 파는 것보다 가이드의 수익이 훨씬 크지 않겠어요?


우리는 포장도로로 한 시간을 더 걸었다. 마침내 점심 먹을 식당에 도착했다. 나는 싱가포르 부부와 프랑스 아가씨, 네덜란드 부부랑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들 서울에 관심이 많았다. 한류가 대세인 건 확실했다. 이구동성으로 사파의 겨울은 'Wrong seasen!'이라고 외쳤다.


밥을 먹으며 각자 어디를 여행했는지 털어놓았다. 여행자들이 흔히 하는 질문, '언제까지 사파에 머무냐? 사파 다음엔 어딜 가냐? 내일은 무슨 계획이 있냐?' 등을 물었다. 가이드보다 일행과 어울리는 게 재밌었다. 미얀마에서 껄로 트래킹을 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실력이 영 별로인 가이드를 제치고 같은 팀이었던 프랑스 아저씨 두 명과 이야기하는 맛에 걸었다.


나는 식탁에서 재밌는 현상을 발견했다. 아시아인들은 채소 요리를 싹싹 먹어치웠고 서양인들은 고기 접시만 텅텅 비웠다. 역시 고기 없이 못 사는 사람들이었다. 맞은편의 싱가포르 부부에게 접시를 가리키며 "저들은 고기만 먹었어요!" 했더니 아하 하며 웃었다.




최종 목적지는 자이족이 사는 따반 마을이다. 도우미 아줌마들과 헤어진 뒤론 포장도로만 걸었다. 아까 일부러 힘든 산길만 골랐을 거라는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중간에 우리는 몽족 집을 방문했다. 깜깜한 판잣집 방 안에 노인이 누워있었다. 관광객이 마구 들어가도 되나? 우리가 가는 걸로 이 집에선 사례를 받나? 가이드의 설명은 어이없을 만큼 부실했다. 여기가 부엌이고 저기가 젊은 부부 방이고 요기가 노인 방이다. 이들은 매우 가난하다. 끝.


가이드가 맘에 안 들어도 어쨌든 따반 마을에 도착했다. 홈스테이 집에 프랑스 아가씨와 인도 청년만 남았다. 두 명은 홈스테이 일박을 신청했고 나머지는 사파로 돌아간다. 여기서 인도 청년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이 홈스테이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어떻게 자기가 뭘 할지 모르고 올 수가 있나? 하긴 장화도 없이 비닐봉지 하나 들고 올 때부터 이상했다. 그가 투어 상품을 산 데가 호텔인지 여행사인지 모르겠지만 엉터리로 일처리를 한 게 틀림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다들 돌아가는데 나는 왜 남아야 하냐며 슬퍼했다.


우리는 너무 웃겨서 울지 말라고 놀렸다. 정 싫으면 그냥 같이 돌아가자고 했다. 그는 이미 낸 투어비가 아까운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너 뭐냐? 바보냐? 반면 프랑스 아가씨는 침착하게 신발을 벗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겸 침실이었다. 내부가 무척 넓었다. 가운데에 나무 침대가 몇 개 놓여 있었다. 저기서 잠을 자나 보다. 밤에 춥지나 않아야 할 텐데. 울기 직전인 남자와 차분한 여자를 두고 나머지는 벤을 탔다.      


나는 소수민족 마을 트래킹을 하기 위해 평이 좋은 여행사 두 곳을 미리 알아놓았다. 하나는 'Sapa O’Chau'였다. 소문과 달리 무례한 태도에 실망했다. 다른 하나는 몽족 여성단체가 운영한다는 'Sapa sisters'. 주소지에서 도무지 사무실을 찾을 수가 없어 돌아왔다.


사실 날씨가 너무 안 좋으니까 트래킹을 꼭 해야겠다는 의지가 없었다. 거의 포기하려다 마지막에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기대가 없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진흙탕 오르막 산길을 남의 손 잡고 걷기 위해 갈 필요가 있었을까.


겨울에 특히 1월의 사파는 권하지 않겠다. 지독한 안개가 24시간, 일주일 내내 덮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경치는커녕 코앞도 보이지 않아 힘들게 사파에 온 보람이 없었다. 해가 나더라도 10도 전후의 기온엔 난방이 필요하다. 화롯불이라니. 조선 시대도 아니고. 물론 호텔방엔 히터가 되므로 춥지 않다. 식당이나 카페에 앉아있으면 손발이 시렸다.


사파에 온 지 삼일쯤 되었을 때 날씨에 희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노이로 돌아갈까 하다가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아니다 싶으면 과감하게 이동해야 하는 걸 그새 잊었다. 남은 호텔비가 아까워서 그냥 뭉갰다. 코로나 3년 동안 감이 떨어졌다.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가을에 다시 와야겠다.

    



<연재 브런치북>

월, 화, 수 : 얼떨결에 시엄마

목, 금, 토, 일: 베트남이 춥다니요


<완결 브런치북>

그래서, 베트남

중년에 떠나는 첫 번째 배낭여행

유방암 경험자입니다만

제주살이는 아무나 하나

무작정 제주, 숲길과 오름

딱세줄


      

    

    

        




 

  

이전 13화 가도 후회 안 가도 후회하는 깟깟마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