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박자가 도와준 조촐한 승리
E씨의 점심시간. E씨는 구내식당에 가지 않았다. 오늘 구내식당 메뉴가 맘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며칠 째 사골 곰탕을 우려우려 먹고 있는데, 오늘의 점심특식이란다.
'진한 사골육수로 끓인 뽀얀 국밥 그리고 빨간 깍두기'
E씨는 메뉴판을 보자마자 뒤돌아섰다.
"요새 몸이 좀 허한가, 피곤해."
라고 했던, 정말 수화기 너머로 스치듯 전한 그 가벼운 한 문장에 이렇게까지 진하게 반응한 묵직한 10리터들이 사골국들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미 다이어트 냉동식품들로 가득한 E씨의 작은 냉장고에 그것들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그 찐한 사랑을 몸으로 받아먹는 중이다.
아침 저녁 보신하는데 뭐 한끼쯤이야. 어디서 뭘 먹나, 혼자 먹을 건데, 날씨는 또 왜 이렇게 더운 거야. E씨는 회사 근처를 방황하며 한 끼 식사를 할 곳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날씨가 더워도 더워도 너무 더웠다. 조금만 걸었음에도 땀이 났다. 그때 E씨의 눈에 작은 편의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런 곳에 편의점이 있었나. E씨는 얼른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원했다. 작은 공간이라 에어컨이 제대로 기능하고 있었다. 그래 오늘은 간단하게 먹자.
삼각김밥 하나를 들고 음료 냉장고 칸으로 갔다. 뭘 마시나. 그때 E씨에 눈에 띈 음료 하나. 생청귤(도수 4.5%, 500ml, 청귤컷 2.0%). 진짜 제주청귤슬라이스가 들어있어요!! 보는 순간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입안에도 이 청량감이 이어졌으면 싶었다. 집어? 말어? 꺼내? 말어?
오후에 내가 뭘 해야 했지? 보고할 게 있었나? 아, 오늘 과장님이랑 부장님 외근이었다. 외근하고 바로 퇴근한다고 했다. 마주칠 일도 없고, 날씨는 이렇게 덥고, E씨의 눈앞에 이렇게 매끈한 제주도가 놓여 있다. 혼자, 이 더운 날씨에, 걸릴 위험도 적은 이 타이밍. 낮술의 완벽한 삼박자가 갖추어졌다.
1초가 1분인 듯, E씨의 머릿속 시간은 물리적인 시간과 다르게 흘러 갔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이렇게 많은 자문자답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였다.
E씨는 졌다. 아니 이겼다. 지고 이기는 것의 기준은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다. 이 시간에 이 음료를 선택하는 게 왜 지는 거란 말인가. 아니다, E씨는 이겼다. 정.신.승.리. 이건 술이라기보다 소화제인데. 탄산이잖아.
E씨는 삼각김밥 2개와 생청귤 한 캔을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했다. 그런 E씨의 눈길을 잡은 갈색 방망이. 의성마늘 프랑크. 나는 술을 산 게 아니라 탄산음료를 산 거라 안주가 필요한 건 아니지만, 성인 남성에게 삼각김밥 2개는 점심식사로 좀 부실하니까. 소시지 하나 추가 정도는, 이렇게 해도 만원이 안되는 걸. 이번에도 E씨는 이겼다. 완전한 정신 승리를 이룬 선봉장 E씨는 계산대로 가 점심식사 선불계산을 완료했다.
비닐을 살짝 벗긴 소시지를 렌지에 넣고 30초 버튼을 한 번 눌렀다. 그리고 바로 아래 전자렌지에 삼각김밥 2개를 넣고 이번에는 삼각김밥 아이콘을 찾아 누른다. 혼자 전자렌지 2개를 쓰는 사치라니, 오늘은 정말 대승을 거둔 선봉장이 된 기분이다.
E씨는 데워진 소시지를 꺼내어 비닐 끝을 두 손으로 잡았다. 지금 비닐을 완전히 벗기면 그 열기에 손을 데일지도 모른다. 조심히 소시지를 테이블로 옮겨두고 다시 전자렌지로 돌아가 데워진 삼각김밥 두 개도 자리로 가져왔다. 테이블 위에 오늘의 전리품을 펼쳐 놓았다. 삼각김밥 두 개, 의성마늘프랑크 한 개, 그리고 생청귤 하이볼, 아니 탄산음료 한 캔.
잠시 손을 멈춘다.
방금까지 스스로와 치열하게 협상하고, 합리화를 반복하던 그 정신적 전투가 다시 떠오른다. 상큼한 다자인의 표면 위에 맺힌 작은 물방울들이 방금 냉장고에서 나왔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어서 먹어달라고, 지금이 가장 시원할 거라고.
그래, 오늘은 이게 맞아. 짧은 숨을 고르고, 살짝 당긴다.
철컥- 딸깍- 칙- 슈우욱-!
소리가 생각보다 경쾌하게 울렸다. 맑은 액체 위로 곧 얇은 슬라이스가 한 조각, 조용히 표면에 떠올랐다. 그 순간 코끝에 스트러스의 향이 확 스며들었다. 코로 먼저 한 모금. 상큼했다.
참을 수 없었다. E씨는 뚜껑을 내려두고 벌컥벌컥- 꿀떡꿀떡- 청귤슬라이스는 윗입술에 닿은 채로 청귤향과 함께 한 시원한 탄산음료는 E씨의 목구멍을 타고 온 몸에 전달되었다. 시원하고, 가볍고, 약간의 씁쓸함이 있는 탄산 음료.
시원한 탄산이, 또 그 상쾌함이 지금까지 남아있던 모든 잡념을 가뿐히 밀어냈다.
캬아-
그제야 E씨는 숨을 깊게, 길게 뱉으며 캔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승리한 점심 시간이었다.
삼각김밥도 소시지가 아주 살짝 식었을 지도 모를 잠깐이었다. 500ml의 탄산음료는 어느새 E씨에게 흡수되었다. 삼각김밥과 소시지는 그제야 뒤따라 E씨의 몸으로 전달되었다. 뭐 그냥 점심 식사였다. 조금은 부실하고 조금은 과한 식사였지만 훌륭했다. 전리품의 흔적을 편의점 쓰레기통에 치워버리고 편의점 문을 나섰다. 낮 햇살이 생각보다 따가웠지만 오후 시간은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쩌면 엄마의 진한 마음보다 더 진한 보신을 한 것 같아 살짝의 죄책감이 드는 것은 애써 지워버리고자 했다.
다시 사원증을 찍고 돌아갈 시간.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몰래 후우- 불어본다. 괜찮은 것 같은데 사알짝 신경이 쓰이기는 한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는 애써 숨을 참았다. 자리로 돌아가 한 번 더 후우- 불어본다. 굳이 양치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다. E씨는 주변을 살펴보곤 일어나 탕비실로 향했다.
노란 맥심 믹스 커피를 뜯어 종이컵에 털어 넣었다. 커피와 프림, 설탕의 완벽한 비율의 삼박자 가루가 달큰한 냄새와 함께 종이컵에 쏴아아 쏟아졌다. 어쩌면 이 단내가 상큼한 술 냄새를 덮어줄지도 몰랐다. E씨의 삼박자 승리가 또다시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