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씨. 기념일

'캘박' 해야 할 D씨의 오늘

by 늘해랑



카톡-


오늘 저녁 약속 안 잊었지?

내가 케이크 사갈게.

퇴근하고 봐.

오늘도 화이팅, 사랑해♡



아침부터 아이스 버킷을 뒤집어 쓴 기분. 얼음 가득한 냉수로 샤워를 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 뭐지? 내 생일아닌데, 우리는 눈 내리는 겨울에 만남을 시작했으니 당연 이 쨍쨍한 여름이 1주년일리는 없고. 두 계절이면 200일? 우리 200일도 챙길 그럴 나이인가? 아 모르겠어, 정말 모르겠다고.

D씨는 사라진 1 옆의 하얀 말풍선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답이 튀어나올 리도 없는데 말이다. 번뜩 정신을 차린 D씨는 얼른 노란 말풍선을 띄운다.



응, 알지. 오늘도 힘내요!



출근 준비를 서두르면서도 D씨의 온 머리는 그녀의 연애를 거꾸로 되짚어가고 있었다. 5월, 4월, 3월..... SNS도, 사진첩도, 캘린더도 모조리 올려다보지만 그 어디에도 단서는 없었다. 카톡방을 열어 오늘 날짜를 검색어로 넣어보아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D씨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 대체 뭐야.



사무실 의자에 털썩 주저 앉는데, D씨도 모르게 큰 숨이 새어나왔나 보다. 옆 자리 동기가 말을 걸어왔다. 입사 동기로 D씨와 가장 친한 탕비실 메이트이다.


"아침부터 얼굴이 죽상인데? 카페인 수혈 필요해?"


D씨는 아무말 없이 손짓으로 툭툭 탕비실을 가리켰다. 텀블러에 얼음을 가득 담고 커피머신 에스프레소 2샷을 누른다. 원두가 위잉- 드르르륵, 갈리는 소리가 들리고 D씨는 동기에게 말했다.


"야, 오늘... 무슨 날이야?"

"응? 화요일."

"아니... 혹시 나한테 무슨 날인지 알아? 내가 너한테 얘기한 적 없어?"

"뭔 소리야? 너 오늘 생일이야?"


.....망했다. D씨가 아무리 쥐어짜도 나오지 않는 답을 그녀의 동기가 알 리 없었다.


"아니야, 나 오늘 무슨 날인거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 남자친구랑 저녁에 만나기로 했는데, 케이크를 사온대. 도대체 무슨 날인거야. 뭔 날인지도 모르는데, 난 뭘 준비해야 하냐고."

"케이크으? 무슨 날인지 정말 기억 안 나?"

"어, 전혀. 출근길에 내 기억이며, 휴대폰이며 다 뒤져봤는데 아무 것도 맞는 게 없어."

"그럼... 아무 날도 아닌거 아니야? 그냥 먹고 싶어서 사오는 거 아니고?"

"그걸 아침부터 이렇게 강조해서 말한다고?"

"무슨 날이면 오히려 서프라이즈 하게 말을 안 하지 않았을까?"

"하아...모르겠다. 일단 들어 가자."



자리로 돌아온 D씨는 일단 잊기로 했다. 여기에 빠져 있어봤자 지금은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 것이 마음이지 않는가. 멀어지려 할 수록 더 가까워지는 것이 불안한 마음, 초조한 마음이다. 문득 문득 스치는 섬뜩함. 절대 사무실의 빵빵한 에어컨 바람 때문에 느끼는 서늘함이 아니었다. 이건 싸늘함이었다.

뭘까, 무얼까. 대체 내가 놓친 것은 무엇인가. 케이크에 어울리는 답례품에는 뭐가 좋을까? 뭐라도 사가야 하는 건 아닐까? 편지를 쓸 수는 없다. 뭐라 써야할 지 모르는데 어떻게 쓴단 말인가. 꽃? 보통 기념일엔 남자가 여자에게 꽃다발을 내밀긴 하지만 오늘은 꽃이라도 한 송이 사서 무심한 척 내밀어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더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하는 D씨였다.


어느 하나도 확실해지지 않은 상태로 퇴근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요이땅을 외치고 튀어나가야 할만큼 기다려지던 퇴근 시간이 오늘은 전혀 기다려지지 않는다. 시간에 멈추어다오. 퇴근 시간 5분전에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적처럼 번쩍 떠오른다면 정말 수, 목, 금요일 3일은 불평불만 없이 출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야속하게도 시계바늘은 흘러흘러 땡. 시침이 6, 분침이 12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리고 초침은... 무심히도 쉬지않고 째깍째깍 움직이더니 숫자 12에 도착해 버렸다. 6시다. D씨는 아직 무슨 날인지 모른다. 느적느적 가방을 챙겨들고 사무실을 나왔다. 약속장소로 가는 길. 지하철 역 근처에 작은 무인 꽃가게가 눈에 보인다. 큰 사이즈의 꽃다발부터 작은 꽃다발, 프리저브드 꽃다발, 꽃화분까지 다양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D씨는 '케이크'를 사온다는 남자친구의 메시지를 떠올리니 차마 빈손으로 갈 수가 없었다. 틀린 답이라도 빈 칸보다는 낫겠지 싶어 꽃집에 들어가 푸른 색감의 작은 꽃다발을 하나 구입했다. 기적을 말하는 파란 장미. 하지만 D씨에게 지금 파랑은 새드 블루.



약속 장소인 카페에 들어가니 남자친구는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D씨에게 손 흔드는 그는 D씨보다 4살이나 더 먹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예쁜 미소 한 번 지어준 후 남자친구의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안 좋은데?"

"아니야, 좀 피곤한가? 제대로 못 끝내고 온 일이 있어서 신경쓰이네..."


역시 얼굴에 티가 나나보다. D씨는 화제가 기념일로 돌아가지 않았으면 하면서 얼버무렸다.


"그럼 더 잘 됐네! 짜잔!"


올 것이 왔다. 케이크다. D씨는 심판을 앞둔 죄인처럼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거 봐. DD케이커리! 자기가 먹고 싶어 했던 거기 케이크야!"


DD케이커리? 춘천에 있는 거기? 그 케이크는 춘천의 유명 케이크 가게의 시그니처 케이크였다. 지난 달 D씨가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꼭 먹어보고 싶다고 남자친구에게 호들갑을 떨었던 그 케이크. 정말 그냥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보고 멀어서 당장은 갈 수 없지만 언젠가 한 번 쯤 춘천에 간다면 꼭 먹어보겠다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던졌던 그 케이크였다.


"나 오늘 춘천으로 출장갔다 왔거든. 미팅 장소가 딱 그 케이크 집 옆인거지. 이건 운명이야. 우리 자기 먹고 싶다고 했는데 당연히 사 오는 거지, 이건."


아무 날도 아닌거지? 맞지? 그냥 사온거지? 미팅 장소 옆이 거기여서? D씨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본다. 머릿 속에 떠오른 풀이과정이 맞는 것 같다.

D씨의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고 정말 스르르 풀렸다. D씨의 하루치 초조함이 싸악 날아갔다.


"뭐야, 자기~ 감동."


이건 제대로 된 당충전이다. 다행히 정말 오늘은 아무 날도 아니었다. D씨는 새드블루였던 파란 꽃다발을 가방에서 꺼냈다. 기적의 파란 장미가 되어 피어난 꽃다발을 그에게 건넨다.


"왠 꽃이야?"

"음, 자기 파란색 좋아하잖아. 오는데 보이길래, 자기 생각나서 샀어."

"오, 자기~ 감동!"

"잠깐!"


D씨는 건넨 꽃다발을 다시 뺏어 DD케이크 옆에 내려놓는다. 휴대폰을 꺼내 이리 저리 각도를 재더니 찰칵! 사진을 찍는다.


"히히, 인증샷 먼저!"


D씨에게 오늘은 이제 아무 날이 되었다. D씨의 마음에 달달한 당충전을 해준 사랑스러운 기념일이다. 그러니 오늘을 잊지 않게 사진첩에 기록, 인스타그램에 기록은 D씨가 해야 할 일이었다. 캘박은 당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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