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씨. 라면의 순정

꼭 그렇게 다 넣어야만 속이 후련했냐?

by 늘해랑



오늘이다. 오늘만큼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라면을 끓여 먹을 것이다. B씨는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찬장 문을 열었다. B씨의 눈앞에 네모난 비닐봉지들이 반질반질 그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어떤 아이가 좋을까?"


신진열붉멸짜...그래, 오늘은 너로 정했다. 열라면이다. 아무것도 필요없다. 열라면 한 봉지와 적당히 물을 담은 냄비와 젓가락. 아 냄비받침까지. 세상이 복잡할수록 라면은 단순해야 한다. 물, 면, 스프. 딱 그것만. 그게 라면의 순정이었다. B씨는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해 히죽히죽 웃었다. 물이 끓기 시작하며 기포가 하나둘 위로 떠오르고 있다. 주방 안이 조용하다.


띠띠띠-띠띠띠띠-


그 적막을 깨고 울리는 도어락 소리. B씨는 화들짝 놀라 입에 물고 있던 젓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뭐야? 왜 벌써...!'


B씨의 얼굴은 꼬불한 라면면발보다 더 구겨져버렸다. 라면국물처럼 붉어지기까지 했다.


"어머, 자기! 라면 먹으려고? 맛있겠다. 나도 점심 안 먹었는데, 나도 먹을래. 아니다, 내가 끓여줄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B씨의 여자친구이다.


"아, 어! 자기. 오늘 일 있다고 하지 않았어? 3시쯤 온다며?"

"아, 미팅 끝나고 대리님이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네? 혼자 먹기 그래서 그냥 왔어. 뭐 시켜먹나 했는데, 잘 됐다! 내가 끓여줄게! 열라면이네?"


말을 마친 B씨의 여자친구는 익숙한 듯 B씨의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가스레인지 앞에서 B씨는 엉거주춤 굳어버렸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B씨의 주변으로 B씨의 여자친구는 종횡무진 움직였다. 손이 빠른 그녀는 어느새 냉장고에서 한 가득 식재료를 꺼내와서는 싱크대에서 쏴아- 조리대에서 탁탁탁탁-. 어느새 물이 담겨있던 냄비의 물은 버려지고, 기름이 흥건히 둘러져 있었다. 한껏 열을 머금은 기름 위로 치이이익- 다진 마늘과 송송썰린 파가 들어가고 그녀는 파기름, 마늘기름 심지어 고춧가루도 탈탈 넣고 고추기름까지 내고 있었다.


"오늘의 라면은 말이지... 짜잔, 순두부열라면!!!"


내 눈앞에 새하얗고 탱글한 순부두가 반질반질 웃고 있다. B씨는 순두부와 눈 마주치고 웃고 싶지 않았는데. 순두부는 더없이 해맑았다. 한 대 쥐어박아도 포옹- 하고 내 알격을 그대로 튕겨 내보낼 것 같다. 타격감 제로. 이길 수 없는 대상이다. 순두부같은 그녀.


"자기는 식탁에 가 앉아 있어. 금방 차려줄게!"


순두부같은 그녀의 말엔 내가 낄 틈이 없었다. 부드럽고, 단단했고, 흘러내리지 않았다. 불가항력에 의해 B씨는 식탁에 앉아 조용히 그녀의 요리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B씨의 식탁에 맛깔난 라면 한 그릇이 올라왔다. 참으로 맛깔나 보이는 라면요리였다. 빨간 고추기름이 둥둥 떠 있는 위로 새하얀 순두부가 둠성둠성 누워있고, 계란노른자가 한 가운데 영롱한 자태를 뽐내며 자리하고 있다. 그 아래 숨어있는 꼬들꼬들한 면까지. 사실 완벽한 요리였다. 하지만 B씨는 전혀 군침이 돌지 않았다. B씨가 원한 라면은... 요리가 아니었다. 라면이었다. 인.스.턴.트 본래의 목적을 오롯이 뽐내는 그.냥.라.면. B씨는 오늘은 정말 불량하게 먹고 싶었다. 인생이 복잡한 날엔 그런 맛 하나쯤 있어야 한다고, B씨는 믿고 있었다.


말없이 앞에 놓인 요리를 바라보던 B씨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어서 먹어봐!' 라고 말하고 있는 여자친구가 보였다. 입꼬리가 완벽하게 올라가진 않는 것이 느껴지지만 그래도 씨익- 웃었다. 그녀는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숟가락을 들고 국물 한 모금, 젓가락을 들어 입 안 가득 면치기를 한다. 꿀꺽 삼키고 엄지를 들어올린다.


"맛있네. 역시 우리 자기 솜씨는 대단해!!"


오늘 그녀가 집에 돌아가면 저녁에는 라면을 먹으리라 다짐하는 B씨였다. 그 땐 거울을 보고 스스로에게 양손으로 따봉을 날려주리라.





keyword
일요일 연재
이전 01화A씨. 노란 감기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