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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그 해 여름은 뜨거웠다

by 인생서점 북씨

동네마트 수박코너 에는 국민과일 답게,

사람들이 너나나도, 텅텅, 통통 두들기며

소리로 맛있는 수박찾기에 여념이 없다.

남편은 이미 절반쯤 팔려나가,

빈틈이 드러난 매대 앞에서 수박 가까이 귀를 붙이고

맛있는 소리를 찾는다.

이미 앞선간 사람들이 수없이 두들겼을

수박은 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검푸른 줄무늬의 단단하 껍질속의 수박의 단맛을,

어떻게 소리로만 골라 낼수 있을까?


수박은 어쩌면 내가 시골로 오게 만든 데에

한몫 했다고 장담할수 있다. 나는 양주로

이사 오기 전 북한산과 도봉산의 중간쯤 산자락 아래 살고 있었다.

여름이 가까워질 무렵,

주말마다 둘레길을 찾던 산밑 텃밭 울타리에 조롱조롱

수박이 달려 있었다. 처음 본 풍경에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그냥 지나칠수 없어 물었다.

“선생님 이게 뭔가요?” 수박을 보고도 믿기지 않아 묻는

내게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애플수박 입니다”

수박을 소개하는 모습이 꽤 뿌듯해 보였다.

그날 이후 나는 애플수박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크기가 작아 한번에 먹기 좋다는 장점보다는

생경한 모습의 그 수박이 내 눈길을 사로 잡았다.

맛보다 시각이 먼저였다. 텃밭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키워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매주 둘레길을 걸을 때면

어떻게 하면 애플수박을 키워 볼수 있을까만 궁리하며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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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삼년이 지난 후 양주에서 살는 있는 동생이

농사지을 땅을 사서 텃밭을 하자고 했다.

그 즈음 나는 다른 작물에 관심 이 쏠려 있었다.

모종 판매를 하고 있는 블로그 이웃이 날마다

아스파라거스 모종 사진을 올리고 있었다.

텃밭만 있으면 내가 좋아하는 작물들을 맘껏

심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는 망설임 없이 OK 했다.

남편과 함께 양주로 땅 보러 가는 날. 온갖 작물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그곳 은 상상과는 딴판이었다. 생활 쓰레기가

곳곳에 널브러져 있고, 온갖 잡초와 풀들이

우거져 있었다. 도저히 밭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한,

그저 버려진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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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우리는 입찰을 통해 주변보다 조금 싸게 땅을 구입했다.

기계의 힘을 빌려 쓰레기와 잡초를 치우고 보니

밭으로서의 꼴 이 나타났다. 남편과 나는 가게 일을 팽겨치고

날마다 양주로 달려가 땅을 일구었다.

땀을 흘리며 일군 밭은 제법 작물을 심을 만한 모양새가 되었다

오이, 상추, 토마토등 을 심어놓고 그해 여름,

우리는 그곳에서 하룻밤을 아이들과 캠프 파이어를 즐겼다,

그날밤, 주야장청 떠있는 커다란 보름달은,

바로 머리위에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가까이에 있었다.

애플수박과 보름달의 기운 때문이었을까, 그후,

알고 지내는 동네 사람을 통해 이사를 결정하고 땅을 구입했다.


그 다음해 서울 아파트를 팔고 밭 근처로 집을 지어 이사 했다.

농장에다 마음먹고 좋아하는 아스파라거스

오이 고추 상추 애플수박까지 심었다.

하지만 애플수박은 보기에는 예뻣지만 맛은 기대에 못미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박으로 접목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사 와 막 설립한 회사일 은 농사일에 빠져 있다보니

사공이 없는 배는 산으로 가고 있었다.

매출이 없어 직원들 급여는 대출로 메웠다.

여름이 시작되면서부터 수박 타령하는 손녀 에게

수박은 그림의 떡이었다. 애플수박을 먹자고 했지만

맛이 없어 못먹겠다고 했다. 보기만 좋고 노력에 비해

보답 없는 애플수박 농사는 그해를 끝으로 접었다.

길고양이나 유기된 개들에게 사료를 사다 먹이면서도,

정작 손녀에게 수박 한 통 사주지 못한 현실이 못내 가슴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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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해도, 매출이 없는 회사는 대출도 끊길 지경이었다.

손녀는 여름만 되면 “할머니 우리 수박 언제 먹어”

라며 조르는 것이 일상이었다. 마트에 가서도

“할머니 수박 먹고 싶어 사가지고 가면 안돼”

속도 모르는 손녀의 수박 타령은 그치 줄 몰랐다.

어느 날 같은 사회적기업에서 하는 행사에 참여했을 때였다.

행사장에는 달고 맛있는 수박이 붉은 속살을

드러내며 테이블 곳곳에 놓여 있었다.

집에 있는 손녀 생각에 차마 수박에 손이 가지 않았다.

끝나고 집에 갈때쯤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동생이

“수박 남은거 아린이 갖다줘“ 했을 때 그 소리 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집에 가지고 가서 손녀에게만 먹였다, 그때 막 중학생이 되는 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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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해를 끝으로 농사일을 접고 회사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중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부터 손녀는 뭔가를

눈치를 챘는지 여름이 와도 더 이상 수박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좋아하는 이모할머니를 만나지 못하는 것 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다행이 회사 매출은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고

간간히 수박을 살 수 있을정도는 됐다.

이제는 농사짓듯이 회사일 에 신경을 써서인지

수박정도 는 살수 있을 정도가 됐다


남편은 마트에 가면 통 크게 수박 한 통씩을 사들고 온다.

도마 위에 올려 호기롭게 칼을 가져다 대면 수박은 쩌억

기분좋은 소리를 내면 갈라진다. 붉은 속살이 드러나고 과즙이 흐른다,

수박을 깍두기 모양으로 잘라 그릇에 차곡차곡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면 손녀는 밥 대신 수박그릇을 들고 방으로 가서 혼자 다 먹곤 한다.

이사 와서의 마음 고생을 떠올리면 그 모든 시간이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짓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도 그 여름은 누구보다 뜨거웠던 우리 가족의 계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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