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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욱 Aug 24. 2021

내집단을 잃어버린 세대

꼰대 말고 어른은 어디에 있을까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거의 누구나 공감할  있는 이야기다. 학교를 가고 사람을 만나며 친구들과 우정을 쌓았다. 처음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봤고 말도  되게 행복하고, 처절하게 슬펐던 감정을 느껴가며 인간으로서 성장했던 시기였다. 그런 성장의 연속 때문이었는지 그땐 어린 마음에 기쁘든 슬프든 이런  상황을 누군가에게 너무 알리고 싶었다. 기숙학교를 다녔던 나에게  대상은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이번에 공모전에서  탔다요’, ‘선생님 요즘에 자소서 때문에 너무 힘들어요’.  고등학교 시절 희로애락의 순간에는  순간들을 함께 나누고 싶은 선생님, 소위 “들이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나왔던 “이라는 단어는 아마 고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단어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지금 보면  입에서 “이라는 단어는 정말, 정말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신분이나 삶을 살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유를 계속 들여다보면 결국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무의식적으로 의지가 되고 기대고 싶은 존재가 사라졌다는    있다.


우리 주변엔 지금 ‘선생님’이 없다.


“꼰대의 등장”
권위적인 사고를 가진 어른을 비하하는 학생들의 은어

꼰대”. 고등학교를 지나 대학교에 들어와 가장 새롭게 들었던 단어다. "꼰대". 그냥 단어만 들었을 때도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꼰대는 누구나 해당될  있었다. 교수, 학교 직원, 조교, 심지어  동기들까지 꼰대라는 칭호를 얻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익숙하기만 했던 꼰대의 등장은 당시 나에겐 어마어마한 충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모든 것들이 조심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뭉쳐야 했고 함께해야 했으며 서로 공유하고 협력해야 하는 예술대의 특성상 예술대생에게 꼰대의 등장은 개인의 집단 구성을 방해하게 했다. 물론  속에서 불필요한 규율과 수직적인 관계로만 이루어진 집단들이 여럿 걸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더욱더 조심스러워진 우리는 진짜 내가 속해야 하는, 내가 속할  있는 집단들을 헷갈리기 시작했고 결국 누구를 전적으로 품고 싶다가도 놓아버리고 따르고 싶다가도  발짝 물러서는 결과를 낳았다. "꼰대" 등장은 단순히 개인에게 불편함, 무력감을 주는 것이 아닌 소통의 단절을 만들었고 그것들이 모여 집단 , 세대 간의 통합을 방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심하게 방해받고 있다.


방해받는 삶을 살며 우리가 진정 원하는 집단의 모습은 무엇일까? 다시 끈끈한 연대감을 느낄 수 있는 꼰대 등장 전의 관계? 아니면 언제든지 집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연대를 추구하는 느슨한 관계? 중요한 건 필자 본인은 지금껏 살아오며 두 가지의 집단 모두 다 그리워했던 적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히 내 추억들을 아름답게 회상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 결속되고 끈끈한 관계도, 서로가 서로를 터치하지 않는 느슨한 관계도 모두 그리웠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들의 순위를 생각보다 정할 수 없었고 심지어 내가 어떤 관계를 선호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런 모순적인 이유를 찾으려 부단히 노력했는데 이유는 오히려 오래된 내 사진첩과 서랍 그리고 옷장을 정리하며 알 수 있었다.


학교를 입학하고도 5년이 지난   지금도  신입생 명찰을 버리지 못했다.


단순히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기 때문이 아니다.   속에서 확실한 내집단이라는 집단을 경험했다. 그리고  내집단이 주는 긍정적이고 건강한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아주 강한 메시지와 동기부여를 주고 있다.  번이라도 내집단에 속해본 사람은  것이다. 본인이 소속감을 느끼는 집단이 있다는 것이 가족 외적으로 얼마나  행복과 동기부여가 되는 일인지. 결국 나는 '내집단' 경험한 집단에서 관계의 안정감과 개인의 행복을 느꼈다.


지금 우리는 '내집단을 잃어버렸다'


꼰대의 등장으로 우린 집단 구성에 어려움을 느꼈고 능동적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만드는 일을 점차 수동적으로 바꿔가는 일에 익숙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사람과 사람 간의 거리 두기는 우리에게 진정 속할 수 있는 내집단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지금 서로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떻게 하면 우린 내집단을 건강하게 가질 수 있을까? 지금 이 시기에는 어떠한 관계들이 맺어져야 할까?


끈끈하지만 느슨하고 수동적이지만 능동적인 그런 관계.


너무 '이상적인' 주장일  있다. 그런데 꼰대가 아닌 어른이 있고  어른들이 만들어 내는 느슨하지만 확실한 연결들이 보이는 소통의 집단. 이런 집단이 과연 존재하지 않을까? 이런 집단은 상상 속의 아름다운 인간관계일까? 아마 존재하긴 정말 힘들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관계가 우리 사회엔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어른의 등장이다. 꼰대가 아닌 어른이 필요하다. 나이만  어른이 아니라 나이를 먹을  아는 어른 말이다.


'나의 아저씨'. '검색어를 입력하세요 WWW', '미생'과 같은 드라마가 말하고 있는 공통적인 분모는 진짜 '어른'을 담았다는 것이다. 본인의 경험이 이 세상의 정답이 되는 꼰대 말고 공감을 바탕으로 소통할 수 있는 진짜 어른 말이다. 나보다 어리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의 어제를 사는 것이 아닌 같은 오늘을 다른 나이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인식해 주는 어른은 참 보기 힘들다. 만약 찾았다면 외쳐야 한다 '유레카'라고. 그런데 우린 지금 이런 어른들이 필요하다. 내집단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는, 더욱더 헤쳐나가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인 청년들을 바라봐주고 보살펴주며 인도해줄 어른이 우린 반드시 필요하다.


힘들면 선생님을 찾았던 우리는 이제 누구를 그렇게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을 까? 엄마 아빠? 아무래도 시대적으로 어울리는 대표적인 어른상이 나와야 할 타이밍인 거 같긴 하다.



사진 출처 : @unicpic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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