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FP의 괴로움 1
나는 대체로 어디 가든 웃기기 위해 애쓴다. 그것은 아주 오래된 습관으로, 뭔가 분위기를 타고 웃기는 말을 하거나 농담으로 모두 빵 터지게 만드는 것을 중시한다. 왜 그런가를 가만히 생각하니 주목을 받아야 하는 것, 나로 인해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나를 중심에 두는 것 때문인 것 같다. 맞다, 나는 곧 죽어도 ENFP다.
그런 내가 호주에 와서 못 웃기고 있다.
언어 장벽은 그 허들이 꽤 높아서 내 말에는 보통 pardon? 뭐라고요? 하기들 마련이다. v, f, r과 같은 발음들은 우리가 안 쓰던 것들이라 분명히 입술과 혀를 많이 굴려줘야 한다. 오버가 아니라 안 굴리면 그들은 못 알아듣는다. 가령 나는 가톨릭 세례명을 따라서 어릴 적부터 영어이름으로 로렌 Lauren을 쓰는데, 참 멋쩍게도 내 이름조차 잘 못 알아듣는다. 플로렌스? 노노 로우뤤. 아 로우런.
영어 쓰기 힘들다. 20년 전은 혼자였기에 어딜 가나 무조건 영어를 써야 했는데, 여기가 호주인지 한국인지 한국어로 한국인들과 사니 영어두뇌회전은 쉽지 않다. 밖에 나가면 떠드는 대화와 방송의 영어를 들을 수 있으나 영어를 쓸 기회가 많지 않다. 가장 많이 듣는 영어는 "Do you need a receipt? 그렇다 바로 "영수증 필요하세요?"다. 참고로 웬만한 가게들은 다 앉아서 QR로 주문 결제를 하고, 마켓이나 쇼핑몰도 클릭 앤 콜렉트라고 장바구니 담아서 결제하고 가서 찾으면 된다. 우리나라 빠른 배송만큼은 아니지만 여기도 마켓 식료품 배달해 준다. 배달시간은 왜 정했나 싶게 늦어서 문제지.
결정적으로 친구가 없다. 이웃들이 있다. 옆집 뉴질랜드 부부, 앞집 그리스 할머니, 그 건넛집 독일에서 온 호주인. 그러나 모두들 바쁘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고 있기에 이웃집 동양인 여자와 차 마실 시간은 쉽지 않다. 곧 만나-하고는 달이 훌쩍들 간다. 그러고 보니 나도 서울집 엘리베이터에서 인도계 위층 사람들을 만났을 때 인사만 스윽 했을 뿐 따스한 말 한번 건네지 못했다. 그냥 바빴고 관심을 못 가졌다. 그게 이제 와서 많이 미안하다. 아랫집 이웃이었는데 나는 왜 그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어찌 지내는지 묻지 않았을까. 우리 친구니까 차 한 잔 해요-라고 나의 호주 이웃들에게 말하는 나는 그래서 바쁜 그들에게 서운할 수가 없다.
요가수업 수강을 시작했다. 어느 요일은 7명 어느 요일은 20명 격차가 있지만 거의 모두 다 서양 백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이다. 여느 오전 9시 30분의 수강생이 그럴 수밖에. 혼자 뿐인 동양인 여자 나는 정신을 집중하고 동작을 잘해야 한다. 1시간의 영어 듣기 평가인 것이다. 보통의 요가수업처럼 처음에는 명상의 말들을 하고 동작을 시작하는데 정신을 바짝 차리고 나만 동작을 못하거나 반대로 하지 않게 열심히 노력한다. 그리고 그들과의 스몰토크가 시작되었다.
애들 방학이 2달이에요. 오 마이갓. 나는 매일 도시락 싸고 청소하면서 하루를 보내요.
아 정말 안 웃긴다. 뭔가 웃기는 포인트를 잡아야 하는데. 그들의 대화를 하나하나 삼키기 위해 정신이 없다. 그래도 그들은 "어머 너 힘들겠다. 애들 데리고 와 너 요가할 때 수영하라고 해라. 애들 수영할 줄 아니.."등등 뭔가 받아주시고 염려해 주신다. 하나뿐인 동양인 여자라 첫날 머쓱한 표정으로 들어갔는데 산타클로스 표정의 할아버지가 안녕! 하며 우리랑 같이 이야기할래? 하고 껴주신 덕분이다. 스몰토크의 중요성은 워낙 많이 들어서 우리나라에서는 요가하기 전에 조용히 앉아 정신을 가다듬는 것이 분위기였다면, 여기는 모두 3-4명씩 모여 서서 10분씩 이야기를 나눈다. 스몰토크 현장에 합류. 그렇다. 첫날은 나 혼자 앉아 있었다.
이 호주 사람들의 유머가 보통이 아니다.
오늘은 러닝머신을 하다가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었다. 뉴스는 20년 전 네 아이를 죽였다고 유죄를 받은 여자가 20년 만에 무죄를 받았다는 대충 심각한 내용이었는데 그 재판의 판사들 복장이 아래와 같았다. 아 정말 크리스마스 도대체 무슨 난리가 나는 걸까. 이 나라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물건을 10월 할로윈과 같이 깔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3달째 캐럴과 산타클로스란 말이다. 정말 12월 25일날 무슨 일이 날 것만 같다.
더불어 온 동네는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난리다. 심지어 크리스마스 장식을 잘 한 집을 뽑아서 그 집을 공개하는 행사를 한다. 선정된 집이 동네별로 목록에 주욱 나오고 그 집을 방문하여 멋진 장식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썰에는 그렇게 뽑힌 집들은 1년 간 전기세가 무료래나 뭐래나. 워낙 전기세와 물세가 비싼 나라이니 옆 골목 젊은 호주 부부는 매일 장식을 더하고 있다. 오늘도 밤에 지나오는데 어제보다 뭔가 더 추가되어 애쓰고 있군요 파이팅! 을 해주었다. 복장이든 집이든 크리스마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자동차들을 보면 그냥 기본형은 퀸즐랜드 차 영어랑 숫자 섞인 거-도 볼 수 있지만 특이한 것들이 참 많다. 가령 번호판인데 ILOVEU를 핑크로 가득 새겨뒀거나 필시 한국인일 것 같은 BULGOGI도 번호판으로 버젓이 달려있다. 그러니까 개인이 원하는 문자와 숫자를 모아서 번호판으로 등록할 수 있다고 한다. 글자수에 따라 가격이 다른데 오히려 1글자처럼 적으면 더 비싸다는 말씀도 들었다. 그러므로 길을 다닐 때 재미있는 번호판을 찍기 시작했는데 이젠 안 찍는다. 너무 많아서-이다. 번호판으로 웃기다니. 여기서 중요한 건 개인이 아닌 정부다. 그런 개인의 표현을 허용하여 번호판으로 등록해 주는 이 나라 정부는 얼마나 유머능력이 뛰어난가.
문제는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였다.
내일은 요가 수업이 있는 날이다. 뭘로 웃기지? 웃길 수 있는 날을 위해서 영어 앞으로 한 발 전진. 언제나 나는 아직 멀었지만 중요한 건 고민하지 말고 그냥 부딪치는 것. 문법 좀 틀리면 어때, 그들은 다 무슨 말인지 찰떡같이 알아듣지 않나. 그런데 웃기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한다. 그들의 말을 세세히 듣고 함께 웃으며 나의 말을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나에게 없었던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어서 잘 듣지 않았다. 잘 듣고 잘 새기고 잘 웃고 함께 말을 하며 유머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런데 사랑은, 사랑은 유머가 아니다. 그것은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