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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 Feb 02. 2022

공무원이나 되라는 어머니께

저는 글쓰기가 하고 싶다고요.


나는 행정학과를 전공하고 졸업했다. 학부시절 4년 내내 행정학, 행정법 이론을 달달 외웠다. 그리고 중간고사를 치르고, 기말고사를 보면 그 정보는 모두 휘발되었다. 딱히 원대한 포부가 있어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성적 맞춰 들어갈 수 있는 수시 100% 전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결에 들어가서 어리둥절하게 졸업했다.


그러나 부모님의 생각은 달랐다. 나와는 달리 그들은 나에 대한 인생 계획이 명확했다.

 

“우리 00 이는 내성적이고, 사회성도 부족하니 잘릴 걱정 없고 나중에 연금도 나오는 공무원이 딱이야. 쟤는 그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없어.”


그러나, 나는 법과 정치, 행정이 너무 싫었다.

“응~ 그냥 외워. 법인데 어쩔 거야. 태클 노노. 안 외워지는 것도 네 머리 탓. 네 노력 탓.”

동기와 선배들은 한 둘씩 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고, 가끔가다 캠퍼스 내를 걸으면 현수막이 떡 하니 걸려 있기도 했다.


‘07학번 행정학과 000 공무원 시험 합격. 축하드립니다.’


애씀의 흔적들이었다. 07이면 나보다 까마득한 선배였다. 몇 년의 노력 끝에 이룬 결실이다. 나는 언덕을 오르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애석했다. 얼마나 고된 여정일까. 그에게는 벅찬 행복이자 또 다른 시작. 그 시작은 과연 순탄할까? 수많은 민원과 씨름할 청춘의 앞날에 한숨이 나왔다. 감히 생각해보건대 그다지 행복할 것 같지 않았다. (건방지고 오만한 생각일지언정 금빛 미래가 그려지진 않았다는 의미로 생각해주세요.)


하지만 누구든 나보단 나아 보였다. 친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는 했지만 저마다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공모전도 나가고, 인턴도 경험하고, 저마다의 일로 바빴다. 그런데 나는 정체되어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각자의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들을 옆에서 지켜만 보는 심정. 뭐라도 해야 했는데 어디로 달려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내 발끝만 쳐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심정으로 취업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그래서 5개월간 인턴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내 미래를 꿈꿔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처음 하는 직장생활, 그 안에서 파트장님과 대리님, 사원들과 함께 사회생활을 처음 경험했다. 같은 인턴 동기들과는 친하게 지낼 수 있었지만 이미 있던 사원들과는 관계가 어렵기만 했다. 어떤 말을 하면 아부라고 하고 말을 안 하면 반응이 없다며 재미없다는 식이었다.


인턴을 수료하고 다시 밖으로 방출되자 학교에서는 졸업을 하라고 난리였다. 등 떠밀리듯 졸업을 하고 나는 무직의 시기로 진입했다. 7개월의 지난한 시간이었다. 이때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너무 힘들었다. 회사 공고를 보며 더 성실하지 못했던 나 자신을 탓하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취업했고, 2년 후 퇴사했다. 그리고 다시 1년 직장생활을 더 했다.


그리고 한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교 때 보고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이 친구를 동네 문화센터에서 발레를 배우다 만나다니 정말 신기한 인연이었다. 8개월 동안 같이 발레를 배우고, 같이 집에 가면서 참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친구가 한 마디를 건넸다.


“너 아직도 글 쓰니?”


나는 잠시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글이라니... 내가 언제 글을 썼던가? 잠시 로딩의 시간을 거치고 나니 번뜩 떠오르는 옛 기억이 있었다. 쉬는 시간에 그 친구와 했던 대화였다.


“00아 넌 뭐가 되고 싶어?”

“나? 난 솔직히 잘 모르겠어. 넌 좋겠다. 배우라는 꿈이 있잖아.”

“그래도 뭔가 한 가지 하고 싶은 건 있을 것 같은데, 네가 하면 행복해지는 것.”

“음...”     


그리고, 그 친구와 같이 붙어 다니면서 자연스레 대본을 읽었다.

그때 읽었던 게 영화 시나리오, ‘10억’이었다.

그리고, 드라마 대본을 읽기 시작했다.

노희경 작가님 ‘그들이 사는 세상.’ ‘굿바이 솔로’

정지우 작가님 ‘가문의 영광’

김지우 작가님 ‘마왕’

너무 재밌어서 수업시간에 e-book으로 읽고, 다시 읽고, 몇 차례나 다시 봤다. 어쩜 이렇게 흡입력 있게 잘 썼을까. 단어 선택도 문장력도 탁월했다. 이렇게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작가’가 되고 싶다로 확장되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단 한 번도 대본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다. 그래서 그냥저냥 그저 공부의 도피처로 삼으며 책을 읽고, 대본을 읽고, 그 친구와 이야기하는 재미에 푹 빠져 학교 생활을 보냈다. 그 친구가 ‘아직’ 글 쓰고 있냐는 말은 내가 언젠가 내 꿈을 작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는 말이었을 텐데 그 기억은 나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에 그 친구의 말이 아른거렸다.

“혹시 아직 글 쓰면 우리 작업실 와서 같이 이야기할래? 가볍게 놀다가도 되고.”


작업실이라... 꽤 번듯한 장소 같아 마음이 솔깃했다.

친구에게 작업실 위치를 받아서 동네의 한 옥탑방을 찾았다.

그리고 나는 뭔가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내 세계가 확장되고 있음을 느꼈다.     


‘내가 모르는 사이 이 아이는 꿈을 향해 정진해왔구나. 공부하고, 연구하고, 시간을 들여서.

이 아이와 같이 있으면 나도 뭔가를 해볼 수 있겠다.'


그렇게 1년을 같이 작업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아이에게 캐릭터 연구, 작법, 사람에 대한 혜안을 많이 배웠다.

아마 그 친구가 아니었다면 브런치 작가에 도전하지도 않았을 거다.

왓챠 공모전에 시트콤 대본을 응모할 생각도 못하고, 소설 1 분량의 책을 써서  생각도 감히 하지 못했을 거다. 실행력이 없다 보니 곁에서 지켜보면서 잘했다고 하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데  친구는  한결같이  곁에 있어주었다.

쉽게 우울해지는 내 성향을 알고 직접 보지 못하면 카톡으로라도 격려의 말을 건네곤 했다.

새벽이고 뭐고, 잘 들어주고, 내 맘이 편하게 정리될 때까지 같이 해결 방안을 찾아주려 했다.

정말 고마운 친구다.      


내가 이렇게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는 동안 부모님은 걱정이 많으셨다.

물론 내가 직장생활을 병행하면서 글쓰기를 배우고 있었을 때는 하고픈 데로 해라 두셨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4개월 간 그 생활을 했을 때는 내가 작업실에 갈 때마다 한숨 길로 마중 나오셨다.


‘이제 취직할 생각 해야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나도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 분명한 건 내게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엄마는 잠시 생각하시더니 잘 갔다 오라는 한마디를 하셨다.

엄마는 언제부턴가 내가 당신의 뜻대로 안 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시는 듯했다.

이번 명절 때는 ‘공무원이나 됐으면 소원이 없겠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내가 반응이 없자 말을 길게 하지 않으셨다. (근데 제발 이제 그만하셨으면 좋겠다. 벌써 7년 차입니다.)


공무원은 어머니의 소원이지만 작가로서 유명해지는 건 내 소원이다. 둘의 팽팽한 신경전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아마도 내가 작가로서 수입이 안정되면 끝나겠지.     

공무원 카드를 계속 꺼내시는 어머니께 내가 보여드릴 수 있는 것은

졸라 꾸준히 글을 쓰는 나의 성실함일 것이다.

오늘도 어머니께 보여주기용 글을 써서 올린다.

언젠가 어머니께 인정받는 딸이 되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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