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세시에 만난 사람
새해 첫 소개팅이 잡혔다. 난 스스로에게 하나만을 세뇌시켰다. 바로 ‘너무’ 금지였다.
‘너무 비장하지 말 것.’ ‘너무 들뜨지 말 것.’ ‘너무 앞서 가지 말 것.’
마인드 컨트롤을 마치고, 본격적인 세부 준비에 들어갔다.
우선 메이크업. 눈썹을 다듬고, 로션을 바르고, 파운데이션으로 얼굴 톤을 정리했다.
어제 팩이라도 할걸. 안색이 칙칙해 보여 한숨이 나왔다.
색조화장을 마치고, 오늘을 위해 결제한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어제는 미용실에 다녀와서 염색을 했다. 구두까지 갖춰 신으니 전체적으로 나빠 보이지 않았다. 마치, 결혼식장 하객룩 st 였다. 나를 꾸미는데 들어간 총비용 25만 원이었다.
이런 생각은 버리자. 자칫 비장해질 수 있으니까.
어플로 만났던 인연. 그 기억의 편린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연애할 때 어떤 스타일이세요?”
“혹시 전 연애는 어떤 것 때문에 헤어지셨어요?”
“연애하는 상대방에게 이것만큼은 참기 힘들다 싶은 부분이 있었나요?”
믿기 힘들겠지만, 한 사람에게 받았던 질문들이었다. 불편하고, 불쾌했던 물음이었다.
나는 이번 소개팅 남에게 단 한 가지를 바랐다.
위의 내용의 질문 절대 금지.
만남의 장소에 도착하니, 만나기로 했던 분이 먼저 와서 의자를 정리 중이셨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고, 그분도 맞인사를 했다.
내 머릿속에는 이 생각뿐이었다.
‘어색해 보이거나, 이상해 보이지 말자.’
서른여섯의 남자는 매너도 좋았고, 지식도 많았고, 대화 예절도 좋았다.
거슬리는 점도 없었고, 대화도 끊이지 않고 잘 이어졌다.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분이셨다.
그 나이대의 남자. 어느 정도의 사회경험도 있고, 사회성도 있는 평범한 분이셨다.
이 분에게 비치는 내 모습은 어땠을까?
서른 하나지만 남자 앞에서 뚝딱거리는 여자.
서른 하나지만 스무 살 여자 정도가 가질 법한 이성과의 대화 능력을 가진 여자.
우리는 영화 이야기, 음악 이야기, 취미 이야기, 직장 이야기를 2시간 정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애 경험은 없지만 소개팅 경험은 많아서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서로 전화번호도 묻지 않았고, 저녁도 함께 하지 않았다.
상대는 나에게 호감 시그널을 주지 않았고, 나는 오늘도 아쉬운 이별을 했다.
1. 너무 비장하지 말 것.
2. 너무 들뜨지 말 것.
3. 너무 앞서 가지 말 것.
이 세 가지는 잘 지킨 것 같다. 그런데 소개팅남은 나에게 이 외에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4. 너무 긴장하지 말 것.
소개팅 후에 그에게 온 메시지는 나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말씀하실 때 입술이 파르르 떨리셔서 긴장을 많이 하신 것 같더라고요.
그렇다, 내가 모르는 나의 부족한 부분들, 어쩔 수 없는 부분들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아마 이것 외에도 조금씩 보였을 것이다.
나는 서른 하나지만 사랑의 성숙함 정도는 스무 살 정도다. 현재의 나는 11년 전보다 사랑에 있어서 한 치도 자라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연애 경험이 없다는 것을 숨기려는 것은 키 작은 사람이 자신이 키가 크다고 말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은 아니었을까? 개그우먼 박나래씨가 농구선수인 서장훈씨보다 키가 크다고 말하면 듣는 사람의 대부분이 코웃음을 칠 것이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눈에 훤히 보이는 것을 속이려 부단히 도 애를 썼다.
웃긴 것은 내가 숨기려 할수록 그것은 내 약점이 되었고, 열등감이 되었고, 아픔이 되었다. 내가 모태솔로임을 숨기려 했던 것은 나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상처받기 싫었기 때문이다. 연애를 못했다는 건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고,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까.
사람들은 내가 스무 살이라는 이유로 숙맥이다, 남자 이야기하면 얼굴이 빨개진다, 순수하다, 라는 말을 사용해가며 나를 놀렸다. 마치 스무 살이니 그래도 된다는 것처럼. 놀림이 정당화라도 된 듯 내게 막말을 했다.
나는 그 이후로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연애 경험이 있는 척 행동했다. 누군가 연애 상담을 하면 ‘맞아, 그렇지.’ 정도로 말을 아꼈다. ‘나는 잘 몰라. 나는 아직 첫사랑을 못해봤거든.’이라는 말이라도 잘못 나오면 다시 그런 취급을 받을 테니까.
소개팅이 끝나고, 저녁밥도 먹지 못하고 온 딸의 밥을 차려주시는 어머니가 한 숨을 푹 쉬셨다.
“아니, 시간이 몇 신데 밥도 못 먹고 왔어?”
“응... 그렇게 됐어.”
“밥 먹잔 소리도 안 하디?”
“응... 안 하더라고.”
어머니는 내가 웅크리고 있는 틈을 타 내 등에 총을 한 발 더 쏘셨다.
나는 외마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그럼 너라도 하지.”
언니가 한 마디 거들었다.
“남자가 오후 3시에 만나자고 한 건, 차를 마시고, 괜찮으면 밥을 먹겠다는 거 아닐까.”
“그 남자도 연애 경험이 몇 번 없대.”
언니도 한 숨을 쉬며 말했다.
“그래, 연애는 누구 하나 미쳐야 시작하지. 적극적인 사람이 있어야 되는 거지. 둘 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돼.”
엄마가 응수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밥을 우적우적 씹었다.
올림픽 중계가 떠들썩하게 선수들의 경기 진행상황을 알려주는 동안, 나는 핸드폰만 바라봤다. 정말 이대로 끝인가. 이번 판도 정말 아웃인가. 연락드리겠다는 말도 인사치레의 말이었을까? 점점 생각이 확장되려는데 문자가 한통 왔다.
잘 들어갔는지, 저녁은 먹었는지, 그리고 내일 연락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이 마치 "내가 연락 주기 전까지는 먼저 연락하지 마."라는 말처럼 들렸다.
핸드폰을 닫고, 조용히 티브이를 보면서 이번에도 역시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나는 적극적일 생각이 없었고, 상대방도 역시 그러했다.
누군가 만날 작정을 하지 않는다면, 다음 만남은 없겠지.
아니면 또 오후 3시에 약속을 정하거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