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사랑에도 서사는 있기 마련이다.
5년 동안 짝사랑을 했다. 고백은 못했지만 아마 그 아이도 알 것이다. 동기 모임은 매주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달처럼 그 애 주위를 맴돌았다. 그 애 옆에 서서 걸을 때면 숨이 차도록 빠르게 걸어야 했지만, 그것도 나름 행복했다. 나중에야 알게 됐다.
너와 내가 같은 마음이었다면 네가 내 느린 보폭을 맞춰줬을 거란 걸.
내가 너의 걸음을 못 따라가면 너는 훌쩍 앞서 걸었고, 나는 어느샌가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네가 내 친구와 연애를 시작할지도 모른단 말을 들었다. 나는 둘이 잘 어울린다는 말은 차마 하지 못했다.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고, 내 정리되지 못한 마음은 빈 서랍 속에 그냥 처박혔다. 들을 사람이 없어진 나의 고백은 무용해졌다. 너를 짝사랑하고 난 후부터 난 너를 욕하기보다 나를 욕하게 됐다.
너의 시큰둥한 반응도, 무표정한 말투도, 나의 일상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는 너의 무관심함도 다 내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쯤 나는 내가 하찮게 느껴졌다.
왜 너였을까? 어수룩하고 멋도 없는 너를. 왜 난 좋아하게 됐을까. 성경을 읽고, 감상을 나눌 때 종이에 적어 네 말을 정리한 뒤 차분히 전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을까? 서툴지만 기타를 치며 찬양을 부르는 모습에 설렜던 건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화제를 전환하고, 이야기를 풀어가는 엉뚱함이 좋았을까. 여러 가지의 너의 모양이 내 눈에 담기기 시작할 때 사랑이 시작됐나 보다. 내 사랑은 네가 느리기 보이기 시작했을 때 깨어났나 보다.
네가 군대에 가기 전날 밤, 나는 핸드폰을 붙들고 너의 번호를 찾았다. 그러나 끝내 통화 버튼은 누르지 못했다. 눈물만 하염없이 나오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볼이 아리도록 그렇게 3시간을 울었다. 울고 울어도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너를 보냈다.
네가 없어도 나는 충분히 다른 사랑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너 같은 아이는 많을 것이란 나의 오만이었다. 내 예상대로 괜찮은 남자들은 많았지만 그들이 ‘너’ 일 수는 없었다. 그걸 알게 된 건 네가 제대하고 돌아와서였다. 너는 내 시간을 정확히 5년 전으로 돌려놨다. 그동안 내가 애써 그어놨던 선을 너는 웃으며 넘어왔다.
너를 좋아하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서 인지 나는 또다시 너를 사랑하려 했다. 나는 너에게 달려가려는 내 마음을 다급히 붙잡았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조금 지나서 다행히도 나는 너를 보지 못하더라도 그립지 않아 졌고, 그럭저럭 지낼만해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너와의 거리도 늘려갔다. 친구들에게 네 소식을 듣더라도 아무렇지 않아 졌다. 그래서 나는 이제야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 달 전 너와 닮은 사람을 교회 근처에서 봤다. 연인과 다정히 손을 잡고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토라진 연인의 마음을 풀어주려 간이라도 떼어줄 정도로 애절해 보였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마스크 속에 가려진 얼굴이 너일 까 봐 내내 마음 졸였다.
내겐 아무런 상관없는 일인데도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걸 보면 내 마음이 아직 너를 향해 있는 걸까? 식당을 나와서 친구에게 물었다. “쟤 혹시 00이야?” 친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마음을 놓는 나를 보고 놀랐다. 왜 아직도 이런 걸로 마음 졸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많았다. 내 성격적인 결함일 수도, 인간관계가 서툴렀을 수도, 이성적인 매력이 떨어져서 일수도, 종합적인 스펙이 달려서 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비슷한 조건을 가진 사람들은 연애를 시작한다. 내가 연애를 못하는 것은 무의식 중에 ‘너’ 같은 사람을 찾고 있는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대단하다고 할 수 없는 너에게 이토록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쯤 되면 내 마음이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나는 너를 열렬히 사랑하는 것은 아니나, 아직 사랑하고 있는 걸까? 내 마음이 아직 쉬지 않는 걸까. 좋은 사람을 만나 다른 사랑을 시작하려 해도 다른 사람이 좋아지질 않으니 큰일이다. 아마 너의 결혼 소식이 들려오면 이 마음도 접어질지 모르겠다. 열애라고 부를 수도 없는 애달픈 짝사랑은 이제 그만하고 싶다. 외사랑을 한 후에 추억을 잊는 것도 실연만큼이나 아프다. 오늘도 나는 잊기 싫은 마음과 잊어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 싸우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는 또 잊기 싫은 마음의 손을 들어주고 만다.
이제 그만 잊기 싫은 사람이 내 마음의 링 위에서 내려와 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