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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 May 09. 2022

길 좀 잃으면 어때, 가자.

낯선 게 당연하잖아. 헤매도 돼. 크로아티아 여행기(2)

버스 창을 통해 저만치 내다보니 자그레브의 상징인 반 옐라치치 광장이 날 맞이하고 있었다. 반가움에 손을 보일 듯 말 듯 흔들었다. 버스가 서고 나는 짐을 끌고 낯선 곳에 첫발을 디뎠다.

나를 바보로 만드는 지름길은 '네 발길 닿는 대로 걸어봐.'라고 내 등을 미는 것이다. 흔히 여행의 묘미는 낯선 길을 걷는 것에 있다고들 한다. 물론 골목 사이에 난 길에서 운 좋게 맛집을 발견한다거나 흔하지 않은 내 취향을 반영한 보라색 원피스를 파는 옷가게를 알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엔?

잘 익은 김치로 만든 갈치 김치찜을 먹고 마음에 드는 보라색 원피스도 샀다. 해는 졌고 인적도 드물어져 길을 빨리 찾아야겠다는 조바심이 든다. 설상가상으로 길은 사방으로 뻗어져 수수께끼처럼 놓여있다. 어느 곳이 너네 집으로 가는 길인지 맞춰봐. 못 맞추면 알지?

낯선 동네가 그렇듯이 낯선 나라도 같은 상황이다. 숙소는 랜드마크와 무조건 가까운 곳으로, 안전하고 길 찾기 쉬운 곳으로 정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반 옐라치치 광장에서 도보로 1분 남짓한 곳에 나의 숙소를 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반 옐라치치 광장과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관광지만을 보고 숙소로 돌아왔다. 성 마르크 성당과 자그레브 대성당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손 안에는 항상 구글맵이 있었고, 나는 그의 안내에 따라서만 움직였다. 빈 체크라는 젤라토 전문점에 들러 딸기맛, 바닐라맛 한 스쿱씩을 사 올 때도, 늘 구글맵이 나를 보필해주었다.

다음 날 아침은 숙소에서 30초 떨어진 돌라치 시장에서 납작 복숭아를 사 와서 호스텔에서 준 조식과 함께 먹었다. 한국에서 예약한 버스 티켓에는 플리트비체로 가는 버스 출발 시각이 적혀있었다. 8시 30분이었다. 늦지 않게 준비하고 버스에 올랐다.
     

플리트비체에서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을 이용했다. 할머니는 플리트비체로 가는 빠른 길을 알려주시겠다며 나를 숲 속 길로 이끄셨다. 길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흙길이 눈앞에 펼쳐졌다. 울창한 나뭇잎들 사이로 거칠게 자라난 들풀들이 질서 없이 숲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벌써부터 찾아올 길이 걱정되었다. 이정표도 없고, 안내인도 없는데 어떻게 돌아오지 하는 불안함이었다.

바람결에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도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나무 뒤에 숨어 때를 기다렸다 나를 덮치는 곰을 상상했다. 곰은 사람을 찢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몸이 절로 움츠러들어 슬쩍 할머니 곁에 붙어서 걸었다.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르셨던 할머니는 미련 없이 뒤돌아 숲을 빠져나가셨다. 나는 곰의 먹잇감이 되고 싶지 않아 그 길로 전속력으로 달려가 숲에서 벗어났다.
       

플리트비체는 얕은 물이라는 뜻을 가진 호수다. 실제로 얕진 않지만 짐작해보자면 물빛이 맑아서 헤엄치는 생물들이 다 보여서 그렇게 이름 붙여진 것 같다. 자연이 보호된 곳이라 천연기념물도 살고 있고, 야생곰도 살고 있다고 한다.

나는 플리트비체의 관광 경로 중 C코스를 선택했다. 편도로 약 8km 정도였고, 북쪽 1번 코스에서 전기보트를 타고 아래쪽 호수를 구경한 뒤 큰 폭포도 감상했다. 약 5시간 정도가 흐르고 파노라마 기차를 타고 출발지로 내려왔다.

석양은 지고 관광객들은 대부분 가족과 함께 귀가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어른의 무등을 탔거나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있었다. 가족들이 그리워져 눈물이 나려는데 현실감각이 깨어났다. 할머니가 알려주신 지름길을 과연 찾을 수 있을까. 두려움이 엄습했다.

혹시나가 역시나였던 걸까. 이정표 하나 없는 지름길의 입구를 찾을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저녁 7시였는데 해는 왜 이리도 빨리 사라지는지 주변이 어둑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구글맵을 켜서 도착지로 숙소를 찍었다.

걸어서 1.8km.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도가 알려준 길은 차도여서 나는 차가 올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 자빠질 듯 옆으로 비켜섰다. 더불어 사람의 비명 소리, 까마귀 우는 소리, 짐승 우는 소리가 내 두려움을 치솟게 했다. 찬송가를 부르며 걷는 오르막길은 눈물 없이 오를 수 없었다. 다행히도 숙소에는 무사히 도착했다. 의도치 않게 밤 8시 30분까지 쫄쫄 굶었던 나는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을 끓여먹으며 설움을 달랬다. 

헤매도 괜찮아. 길은 사방으로 나있어도 모두가 연결되어 있는걸. 결국엔 잘 찾아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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